[기고]한 가정의 사기 피해, 그리고 아이에게 남은 것

[이승환 경감의 사기(詐欺) 프로파일링]

이번 주말이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식사를 나누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때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고 따뜻한 명절이지만, 어떤 가정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사기 예방에 관한 글을 쓰면서 최근 발생하는 피싱의 다양한 유형과 실제 사례를 소개하고, 왜 사람들이 사기에 속게 되는지 피해자의 심리와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의심하고,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보이스피싱으로 한 가정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고, 그 여파로 가족의 일상마저 무너졌던 한 가정의 이야기다. 그 안에는 어른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어른들보다 더 긴 시간을 견뎌야 했던 한 청소년이 있었다.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은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부모의 한숨과 다툼, 달라진 생활환경, 하고 싶어도 포기해야 했던 일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의 힘든 마음을 쉽게 말하지 못한다. 가족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자신의 아픔을 뒤로 미루기도 한다.

사기는 단순히 돈을 빼앗아가는 범죄가 아니다. 한 사람의 재산을 넘어 한 가정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고, 가족의 일상과 관계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말없이 그 여파를 견디는 사람이 가족 안의 아이일 수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보이스피싱으로 가정이 어려움을 겪게 된 한 청소년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리고 학교와 지역사회, 복지·청소년 지원 등 사회적·제도적 도움을 통해 어떻게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 있는지를 성평등가족부가 시행하고 있는 "학교 밖 청소년 지원 사업"을 인용하여 이야기하려 한다.


보이스피싱으로 무너진 한 가정, 그리고 다시 일어선 아이


늦둥이 외동딸이었다. 사람들은 '늦둥이 외동딸'이라고 하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아이의 어린 시절은 달랐다. 부모는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은 뒤 생계를 위해 바빴고, 집에서는 부모의 다툼과 고부 갈등이 이어졌다. 아이에게 집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날카로운 말이 오갈 때마다 아이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죽였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점점 잊어갔다. 학교생활도 힘들어졌다. 몸이 아팠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멀어졌다. 결국 아이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학교를 떠난 아이를 보면 묻는다. "왜 학교를 그만뒀지?" 하지만 이 아이에게 먼저 물어야하는 것은 다른 질문이여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학교를 그만둔 것은 갑작스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과 갈등, 학교생활의 어려움과 관계의 단절이 오랜 시간 쌓인 끝에 나타난 결과였다. 학교를 떠난 뒤 찾아온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립이었다. 친구를 만날 기회가 줄었고,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사람을 피하게 됐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약해졌다. 그 사이 아버지는 전 재산을 날린 보이스피싱 피해의 후유증으로 치매 진단을 받고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려워졌다. 어머니 역시 가족 갈등으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으면서 아이는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기댈 곳을 잃었다. 가족과 학교라는 두 개의 울타리가 동시에 흔들린 것이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아이가 찾아간 곳은 학교 밖 청소년을 지원하는 꿈드림센터였다. 처음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려웠고,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사회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아이에게 선생님은 말했다. "오고 싶을 때 언제든 편하게 오세요." 평범한 말처럼 들리지만, 오랫동안 세상과 거리를 두었던 아이에게는 달랐다. 그 말은 다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는 작은 신호가 됐다.


청소년의 심리, 작은 성공이 마음을 다시 움직인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설명한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청소년에게 실패가 반복되면 '내가 노력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생길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작은 성공 경험이다. 아이는 센터내 창업동아리 활동에서 자신이 쓴 브랜드 문구가 실제로 선택되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경험을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게 됐다.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다. 회복탄력성은 실패와 어려움을 겪은 뒤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힘이다. 이 힘은 가족의 지지, 주변 어른의 관심, 또래와의 관계 같은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가 회복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이 아이에게는 꿈드림센터와 선생님이 그 역할을 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어른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승환 경감의 조언


아이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어른처럼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가족이 사기 피해를 당해 갑자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거나 부모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 오히려 말을 줄이기도 한다. '내가 이야기하면 부모님이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뒤로 미룬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평소와 달라진 모습을 살펴야 한다. 갑자기 친구들과 멀어지고, 방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거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단순히 사춘기의 한 과정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 사례의 아이도 가족에게 닥친 경제적 어려움과 그로 인한 힘든 시간을 겪으면서 자신감을 잃었다. 하지만 한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이를 다시 세상과 연결시켰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자신이 쓴 브랜드 문구가 실제로 선택되는 작은 성공도 경험했다. 그 경험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이제 이 아이는 자신이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고 싶어 한다. 장차 위기 청소년과 아동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사회도 학교 밖에 있는 아이를 '문제 있는 아이'로 바라보기보다 다시 자신의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선이 필요하다. 학교 밖에 있다고 해서 사회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기 피해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 필요한 것은 비난보다 손을 잡아주는 일일 것이다. 가족이 손을 잡고, 사회가 그 손을 받쳐줄 때 아이는 다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추석 선물인지도 모른다.

이승환 경감(경찰청 치안정보국), '사기 프로파일링' 저자

※ 외부 필진 기고는 CBS노컷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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