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웹툰 비평의 역할을 작품 평가에 머물지 않고 문해력 교육과 독자 발굴, 치유, 글로벌 지식재산(IP) 확장까지 넓혀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작품의 발견과 소비를 좌우하는 시대에 '무엇을 볼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읽고 연결할 것인가'가 비평의 새로운 과제로 제시됐다.
18일 부천국제만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경기 부천 웹툰융합센터에서 열린 '2026 세계만화웹툰평론가대회'에는 한국과 미국, 일본, 프랑스의 만화평론가와 연구자, 창작자, 산업 전문가들이 참석해 디지털 시대 만화·웹툰의 읽기와 비평, 글로벌 확장 가능성을 논의했다. 이날 세계 각국의 평론가와 연구자 간 교류를 위한 '세계만화웹툰평론가연합' 출범도 선포됐다.
행사에는 박 회장과 임봉수 세계만화웹툰평론가대회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토하라 쇼타 구글재팬 정부관계·공공정책 매니저 등이 참석했다. 발표자로는 박석환 재담미디어 이사, 미국 만화 창작자 온리 콤판, 야마우치 야스히로 일본 망가종합연구소 부소장, 로랑 지아나티 프랑스만화평론가협회장, 김소원 경희대 연구교수가 나섰다.
이날 한국만화웹툰평론가협회와 IP융복합산업협회는 '웹툰 IP의 글로벌 확장을 위한 전략적 제휴 협약'도 체결했다. 박세현 회장과 서범강 IP융복합산업협회장은 웹툰 IP의 해외 확장과 비평·산업 분야 간 협력을 위한 교류 기반을 마련하기로 했다.
첫 기조연설에 나선 박석환 재담미디어 이사는 웹툰 산업의 성장에 비해 '잘 읽는 독자'를 기르는 교육과 비평은 충분히 따라오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스마트폰의 세로 스크롤과 미리보기 결제, 몰아보기, 댓글, 알고리즘 추천이 접근성과 소비 속도를 높였지만 독자가 스스로 작품을 탐색하고 깊이 읽는 경험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이사는 작품을 그대로 소비하는 데서 벗어나 맥락과 주제의식을 해석하고 자기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비평적 수용'을 강조했다. 비평문 쓰기와 토론, 창작 워크숍 등을 통해 일반 독자도 능동적인 읽기 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만화·웹툰을 교육에서 한발 더 나아가 치유 영역과 연결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질병과 트라우마를 만화로 다루는 '그래픽 메디슨' 사례를 소개하며, 만화 읽기가 시각·서사 문해력을 키우는 데서 나아가 비약물적 심리 지원과 복지 프로그램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짚었다. 만화평론가와 임상·치유 전문가가 함께 작품을 분류하고 검증해 '치유 목적의 만화 목록'을 구축하자는 구상도 제시했다.
북미에서 '이순신' 만화로 화제를 모은 미국 만화 출판인이자 창작자인 온리 콤판은 이순신 장군의 삶을 다룬 그래픽노블 제작 경험을 통해 '이야기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이순신의 삶에서 역경과 용기, 희생이라는 보편적인 서사를 발견해 2009년부터 관련 시리즈를 출간해왔다.
콤판은 작품을 낸 뒤 미국 각지의 만화 행사와 컨벤션을 직접 돌며 독자를 만나고 책을 알린 경험을 소개했다. 좋은 이야기가 문화와 국적의 경계를 넘을 수 있지만, 세계 독자에게 닿으려면 작품을 유통망에 올려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창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팬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후 세션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발견'과 '읽기 방식'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야마우치 야스히로 일본 망가종합연구소 부소장은 디지털이 만화 접근성을 크게 높인 반면, 서점이나 도서관을 거닐다 예상하지 못한 책과 만나는 '우연한 발견'은 줄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이것도 학습 만화다!' 프로젝트를 사례로 들며, 평소 만화를 읽지 않는 독자를 작품으로 이끄는 데는 알고리즘만큼 전문가의 큐레이션과 도서관·전시 공간 같은 오프라인 접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로랑 지아나티 프랑스만화평론가기자협회장은 프랑스·벨기에 만화와 일본 만화, 한국 웹툰의 읽기를 각각 다른 '독서 계약'으로 분석했다. 프랑스·벨기에 만화가 페이지와 구조를 탐색하는 읽기라면 일본 만화는 연재와 기다림 속에서 시간을 경험하는 읽기, 한국 웹툰은 손가락의 스크롤로 직접 리듬을 만드는 읽기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그는 다만 이를 국가별 고정된 특성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중요한 것은 문화적 정체성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와 독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읽기의 규칙을 이해하는 것이며, 글로벌 시대의 비평 역시 서로 다른 '독서 계약'을 해석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소원 경희대학교 연구교수는 이 같은 차이를 한국 웹툰의 세로 스크롤 형식에서 구체적으로 짚었다. 출판만화에서는 독자가 한 페이지 전체와 여러 칸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지만, 웹툰에서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움직여야 다음 장면이 나타난다. 특히 칸 사이의 긴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 다음 장면을 늦추고 긴장을 만드는 '시간'으로 기능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강풀의 '순정만화',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양영순의 '천일야화' 등 초기 웹툰의 사례를 통해 종이만화의 페이지 문법이 세로 스크롤에 맞는 독자적인 연출로 발전해온 과정도 짚었다. 웹툰이 출판만화를 화면으로 옮긴 형식이 아니라, 스마트폰과 스크롤이라는 감상 조건에 맞춰 새로운 읽기 문법을 구축한 매체라는 것이다.
마지막 라운드테이블에서는 '글로벌 IP 확장 속 만화웹툰 평론의 가치와 의미'를 주제로 논의를 이어갔다. 서범강 IP융복합산업협회장이 좌장을 맡고 온리 콤판, 야마우치 야스히로, 로랑 지아나티, 박석환 이사와 웹툰 '들쥐'의 루드비코 작가가 참여해 글로벌 시장에서 창작과 비평, 산업이 만나는 지점을 살폈다.
이날 세계만화웹툰평론가연합 출범과 웹툰 IP 글로벌 확장 협약도 함께 진행되면서, 이번 첫 대회에서는 비평·연구와 산업·교육·복지 분야 간 협력 방안이 함께 논의됐다.
박세현 한국만화웹툰평론가협회장은 "세계만화웹툰평론가연합을 통해 세계 각국의 평론가와 연구자, 창작자, 산업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만화·웹툰의 미학과 비평, 산업과 기술,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새로운 담론의 장이 열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