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정'(情)이라는 독특한 문화도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더 오래되고,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더 넓은 마음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미운 정'이라는 말까지 사용합니다. 서운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오랫동안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온 사람을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우리의 정입니다.
한국교회도 처음부터 이런 마음으로 '우리'의 범위를 넓혀 왔습니다. 가족과 신분, 지역과 계층의 울타리를 넘어 낯선 사람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였습니다. 가난한 이와 먹을 것을 나누고, 아픈 이에게 치료의 길을 열어 주었으며, 배우지 못한 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교회 안의 '우리'가 세상을 향해 넓어질 때, 사람들은 그 안에서 복음의 온기를 느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한국교회 부흥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우리'는 얼마나 넉넉합니까? 어느새 울타리는 좁아지고 경계는 높은 벽이 되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다르면 밀어내고, 비판을 넘어 비난과 매도로 상대를 지워 버립니다. 우리 편과 상대편,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를 갈라놓습니다. 따뜻하고 넉넉했던 '우리'가 몇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은 깊은 서운함을 느꼈습니다. 평생 섬긴 백성에게 거절당한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을 마음에서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
사무엘에게 기도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호의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서운하게 하고 자신의 뜻을 거절한 사람까지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상처받았지만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고, 백성을 다시 '우리' 안에 품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먼저 그를 바꾸려 드는 일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그 사람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 하나님께 맡기다 보면 낯선 사람은 이웃이 되고, 미워했던 사람도 다시 품어야 할 한 사람이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우리의 좁아진 마음을 넓혀 줍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우리'를 다시 넉넉하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도, 상처를 준 사람도, 교회를 낯설어하는 사람도 따뜻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사무엘처럼 말해 봅시다.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한마디와 한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다시 넉넉한 '우리'가 시작될 것입니다.
배요한 목사(신일교회, CBS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