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미국은 중국산 자동차와 차량용 기술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왔지만, 포드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중국의 배터리·자율주행 기술을 활용하고 있는 추세다. 국내 산업계에서는 미국 마저 대(對)중국 규제를 완화하면 업종별로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 기술에 빗장 친 미국…한국 기업에는 호재?
22일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미국의 대(對)중국 자동차 규제는 완성차는 물론 차량에 들어가는 핵심 기술과 부품까지 광범위하다. 이에 더해 미국 상무부는 중국과 연계된 차량통신시스템(VCS)과 첨단자율주행시스템(ADS)에 대한 규제도 시행할 예정이다. 중국과 연계된 VCS·ADS 소프트웨어는 2027년형부터, VCS 하드웨어는 2030년형부터 규제가 적용된다. 모델 연도가 없는 하드웨어는 2029년 1월 1일부터 대상이다.하지만 미국 자동차 업계 일각에서는 이 같은 규제망을 우회해 중국과의 기술 합작을 이어가고 있다. 포드는 중국 최대 배터리사 CATL의 LFP 배터리(리튬인산철) 기술을 활용해 미국에서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IRA) 규제를 피하기 위해 공장 지분은 포드가 100% 소유하고 CATL로부터 기술 라이선스와 설비 지원만 받는 방식이다. CATL의 기술과 대량생산 능력을 활용하면서 미국 내에서 전기차 배터리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결과다.
중국은 리튬·흑연 등 핵심 광물 정제부터 소재, 부품, 셀 생산까지 대규모 밸류체인을 통합하며 LFP 배터리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전 세계 LFP 양극재 생산의 약 98%를 차지할 정도로 글로벌 공급망을 독점하고 있다.
기존 규제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중국과 협력하는 포드의 움직임에 대해 숀 더피 교통부 장관과 공화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즉각 반발이 나왔다. 더피 장관은 지난 8일 포드의 짐 팔리 최고경영자(CEO)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CATL뿐 아니라 중국 완성차 업체 지리자동차, BYD와의 협력까지 문제 삼으며 중국 기업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촉구했다. 이런 협력이 중국의 기술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최대 시장인 미국의 대중국 견제 기조는 한국 자동차 업계에는 현실적인 안전판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기차 핵심 부품을 만드는 국내 배터리 기업들 역시 이를 기반으로 미국 현지에서 LFP 배터리 생산 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말까지 북미에서 50GWh 이상의 LFP 배터리 생산 능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SK온도 미국 조지아 공장에서 2027년부터 5년간 9GWh 규모의 LFP 배터리를 생산해 미국 업체에 공급하기로 했다. 삼성SDI 역시 미국에서 LFP 생산을 준비 중이다.
국내 시장이 미국의 중국 견제를 한국 기업의 호재로 인식하는 배경이다. 실제로 더피 장관의 강경 행보가 공개된 직후인 지난 9일 LG에너지솔루션 주가는 전날보다 6.46%, SK이노베이션은 11.23%, 삼성SDI는 8.30% 올랐다. 같은 날 코스피는 1.40% 상승하는 것에 그쳐 중국 배터리 규제에 따른 반사이익 기대가 시장에서 부각된 것으로 풀이된다.
빗장 푸는 트럼프? 떨고 있는 車업계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시장과 업계의 기대 심리는 이내 '긴장'으로 전환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 업체들의 현지 생산 가능성을 최근 언급했기 때문이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중국산 자동차를 미국으로 들여오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중국 업체가 미국에 공장을 세워 현지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미국인을 고용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If China wanted to come in and open a plant to build their cars here, I'd be okay with that)고 말했다. 중국에서 생산한 차량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것과 미국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은 다르다는 취지다.
중국차에 완강했던 미국의 빗장을 일정 수준 완화할 수 있다는 신호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 완성차 업계도 조심스레 미국 시장 진출 가능성에 기대하는 분위기다. 해당 업계 관계자는 "정상회담이 끝나기까지는 아무 것도 예단할 수 없지만 가장 큰 자동차 시장에 진출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주요 미국·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자동차 단체들을 중심으로 트럼프 행정부에 중국 자동차 업체의 미국 진출 제한을 유지해 달라는 요구가 터져나오고 있다. 중국 업체가 미국에서 차량을 생산·판매할 경우 미국 자동차 산업의 일자리와 투자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현대자동차도 예외는 아니다.
GM·도요타·폭스바겐·포드·현대차·스텔란티스·테슬라 등을 대변하는 미국자동차혁신연맹(Alliance for Automotive Innovation) 등 6개 단체는 지난 18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 업체의 미국 내 판매·수입·생산을 막는 정책을 유지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서한에는 "중국 업체가 미국 내에서 차량을 판매, 수입, 심지어 직접 생산(현지 공장 설립)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시장 진입 문을 완벽히 닫아두는 정책을 계속 유지해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미시간주 상원의원 엘리사 슬롯킨도 중국 업체의 미국 생산이 기존 업체의 일자리를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대미 수출이 전체 매출의 20% 가량 차지하는 현대차그룹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유럽에서 중국 업체의 가격 공세가 현실화한 것도 현대차그룹의 긴장 포인트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CEO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업체들이 유럽에서 경쟁 차종보다 30~40% 저렴한 가격으로 차량을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 중국 브랜드의 EU 신차 시장 점유율은 9%를 넘어섰다. 무뇨스 CEO는 특히 중국차에 대한 장벽을 없앤 영국에서는 중국 브랜드 신차 등록 비중이 15%까지 올라간 점을 언급하며 미국도 별도의 장벽이나 조건이 없다면 비슷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은 EU처럼 중국산 전기차에 추가 상계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산 전기차에도 일반적인 승용차 수입관세인 10%가 적용된다.
전문가들은 중국차 업체들이 미국에서 생산을 개시한다고 해도 단기적으로는 국내 완성차 업계에 대한 타격이 크지 않겠지만,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생산 개시가 시발점이 돼 가격 경쟁력을 무기 삼은 중국 자동차의 미국 공습이 본격화될 가능성을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훈 오산대 미래전기자동차과 교수는 "중국차가 미국에 진출한다고 해서 당장 현대차그룹이 생산하는 것만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인 대책을 가져가야 한다"며 "팔 수 있는 자동차 파이는 정해져 있는 만큼 중국이 미국 시장에 들어오면 치킨 게임 양상으로 흐를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