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플러스 살리겠다는 말만 번지르르한 거죠. 물건 대주고 여태 한 푼도 못 받았어요. 명절 앞두고도 죽을 지경입니다."
추석을 일주일 앞둔 경북지역 한 영농조합법인 대표 A씨(60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홈플러스에 20년 넘게 농산물을 납품해온 그의 회사는 지금 건물에 들어둔 화재보험까지 해지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직원 월급과 계약 농가에 지급할 잔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A씨 업체는 전국 150곳에 가까운 농가와 계약하고 한때 40명의 직원을 거느렸던 농업법인이다. 하지만 홈플러스가 경영난에 빠지고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가면서 1년 가까이 납품하고도 받지 못한 대금이 16억원까지 불어났다.
그동안 벌어둔 돈으로 버텨왔지만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인건비와 운영비 부담이 커지면서 가족처럼 지내던 직원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직원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래도 납품을 끊을 수는 없었다. 수십년간 거래해온 농가들마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홈플러스 주문을 계속 받아 물건을 공급했다. 농가에 지급할 돈은 A씨가 사비를 털어 선수금 형태로 마련했다.
회사는 매달 5천만원가량 적자를 내면서 버티고 있다. 홈플러스가 지난 2일 법원의 회생계획안 인가를 받으면서 일단 청산 위기는 넘겼지만, A씨에게 돌아온 것은 여전히 '기다려달라'는 말뿐이다.
밀린 돈 지급 절차는 '하세월'…"추석 앞두고 더 암울"
A씨는 최근 홈플러스 측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동안 밀린 납품대금에 대한 연차별 변제 제안서에 동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선뜻 서명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직원 월급과 농가 대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운데 홈플러스 매출이 크게 늘지 않는다면, 수년을 기다려도 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을지 믿기 어렵다는 게 A씨의 판단이다.
특히 협력업체에 대한 대금 지급이 매번 후순위로 밀려온 상황에서 홈플러스가 제시한 변제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이 크다고 했다.
A씨는 홈플러스가 미국의 유통업체 트레이더조 운영 방식을 도입해 매출을 끌어올리겠다는 방안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경영 전략보다, 당장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협력업체에 대한 피해 보전이라는 주장이다.
A씨는 대주주 등이 직접 자금을 마련해 긴급하게 밀린 대금을 변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번 추석은 평년과 다르다. 직원들에게 지급해온 명절 선물이나 떡값은 물론이고, 당장 월급과 농가 대금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홈플러스 회생 절차만 이뤄져 봤자 우리는 전혀 나아진 게 없다"며 "명절이 다가오니까 더 암울하게 느껴진다. 밖에 나가기도 싫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월급 밀려"…점원들은 텅 빈 매장서 한숨만
홈플러스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수도권의 한 홈플러스 매장에서 10여년간 근무한 B씨(50대·여)는 두 달치 월급을 받지 못한 채 추석을 맞고 있다. 매년 명절을 앞두고 계좌에 찍히던 상여금도 아직 소식이 없다.
B씨는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손님이 꾸준히 줄어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여기에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간다는 소식까지 들으면서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고 돌이켰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급여가 끊기자 주택대출 상환과 자녀 학비 등을 걱정하다 하나둘씩 회사를 떠났다. 퇴직금이라도 챙기겠다는 이유였다.
B씨 역시 퇴사를 고민했다. 하지만 회생계획안이 받아들여진 만큼 언젠가는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붙잡고 매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추석을 일주일 앞둔 이날 B씨가 일하는 매장은 한산했다. 판매 구역마다 네댓 명 정도의 손님만 보일 뿐이었다.
10여개에 달하는 계산대 가운데 운영되는 곳은 세 곳. 출입구와 벽면에는 '추석 연휴에도 영업'이라는 홍보물이 붙어 있었다.
매장에서는 명절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손님이 줄어든 매장 안에서 직원들은 평소처럼 업무를 이어갔지만, 밀린 임금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B씨는 "매장에 나와서도 일할 맛이 안 난다"며 "그래도 회생하기로 했으니까 좀 나아져서 예전처럼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밀린 '돈' 어쩌나…"생계 달렸는데 변제는 하세월"
2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홈플러스 경영난으로 인해 임직원과 협력업체들이 각각 임금체불과 납품대금 미지급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8월까지 홈플러스의 누적 임금체불액은 3871억원에 달했다. 노동부의 체불액 청산 지도를 통해 홈플러스가 이 가운데 3207억원을 지급했지만 약 664억원은 여전히 미청산 상태로 추정된다.
협력업체가 받지 못한 납품대금은 공식적인 집계 자료조차 없다. 다만 홈플러스 상거래 공익채권단 협의회가 추산한 미지급금 규모는 7900억원에 이른다.
협의회 측은 지난 8월 공동 대응에 나서며 "홈플러스가 회생 절차에 들어간 뒤에도 정상 영업에 문제가 없고 납품대금도 지급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물품 공급을 계속했다"며 "돌아온 것은 7900억원 규모로 불어난 미지급 대금"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서울회생법원은 지난 2일 홈플러스 회생계획안을 인가했다. 재판부는 당시 "회사가 임직원·협력업체와 협력해 회생계획안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일부 채권자들은 법정에서 회생계획안에 반발했다. 이들은 "홈플러스의 회생계획안은 생계형 피해자들에게 10년을 견디라는 조건"이라며 "수행 가능성에 중대한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홈플러스 측은 그동안 CBS노컷뉴스의 협력업체 변제 계획 관련 질의에 정확한 미지급금 금액은 공개할 수 없지만 납품대금과 임금 변제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