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당한 피해자들이 추가로 국가배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재심에서 무죄가 아닌 '면소' 판결을 받았더라도, 면소 사유가 없어 무죄가 선고됐을 가능성이 높다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다.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23일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피해자들은 1983년 9월 22일 발생한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당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됐고 복역했다.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는 2010년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피해자 등 다수의 민간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불법구금하고 구타와 진술 강요 등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일부 피해자에 대해서는 고문과 가혹행위를 한 사실도 인정했다.
피해자들은 이후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법원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당시 집시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아닌 '면소'를 선고했다. 면소는 유·무죄를 판단하는 대신 법적으로 더 이상 처벌할 수 없는 사유가 있을 때 재판을 끝내는 판결이다. 이 사건에서는 범죄 이후 법이 바뀌어 형이 폐지된 점이 면소 사유가 됐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재심 판결이 확정된 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원심은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피해자의 일부 청구에 대해서만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반면 면소 판결을 받은 집시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심은 면소 사유가 없었다면 무죄가 선고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다. 일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서는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재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더라도 수사기관의 위법행위가 유죄 판결로 이어졌는지를 별도로 따져 국가배상 책임을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면소사유가 없었더라면 무죄판결이 선고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관하여 고도의 개연성 있는 증명이 이루어진 경우라면 국가기관이 수사 과정에서 한 위법행위와 유죄판결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대법원은 이번 사건이 이에 해당한다고 봤다. 피해자들은 당시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거나 위압적인 상태에서 자신과 다른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진술을 제외하면 나머지 증거들은 국가보안법 등 유죄를 인정하기에는 증명력이 부족하거나 단순한 정황증거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앞서 법원이 피해자들의 구금 기간 전체에 대해 형사보상금 지급을 결정한 점도 근거가 됐다.
대법원은 일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시효가 지나 사라졌다고 본 원심 판단도 뒤집었다.
원심은 피해자들이 출소한 1984년, 늦어도 진실화해위원회의 일부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2010년에는 피해자들이 손해와 가해자를 알았다고 보고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기존 유죄 판결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까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는 어려웠다고 봤다. 유죄 판결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수사와 기소, 유죄 판결 등에 대해 국가의 불법행위를 주장하며 배상을 요구하기는 어려웠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재심 면소 판결이 확정된 시점부터 손해배상청구권의 단기소멸시효가 진행된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