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면증을 '웃음거리'로 만든 콘텐츠…"부정적 낙인에 환자 위축"[이런일이]

위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스마트이미지 제공

"기면증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건 TV나 영화에서 본 게 전부였어요. 그런 매체에서는 대개 우스꽝스럽고 지나치게 과장된 데다 아주 흑백논리식으로 단순하게 묘사하곤 하죠. 하지만 제가 겪는 증상은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갑자기 잠들어버리는 그런 상태가 아니거든요." _기면증을 앓고 있는 TV 진행자이자 성우 마하 아와드, '허구적 서사 엔터테인먼트 속 기면증' 중
 
"기면증을 떠올리면 영화 '듀스 비갈로'(Deuce Bigelow: Male Gigolo)가 생각나요. 영화 속 여자가 식탁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잠들어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걸 보고 '아, 적어도 나는 저런 증상은 없구나'라고 생각했죠." _기면증을 앓는 전직 NFL 선수 조시 앤드루스, '허구적 서사 엔터테인먼트 속 기면증' 중

 
영화나 드라마가 기면증을 현실과 다르게 왜곡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실제 기면증 환자에게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22일(현지시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및 저널리즘 스쿨에서 발표한 '표현의 문제점: 허구적 서사 엔터테인먼트 속 기면증'이란 제목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기면증은 의학적 질환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조롱거리'로 묘사됐다.
 
기면증은 뇌의 수면-각성 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겨 발생하는 만성적인 신경학적 질환이다. 기면증은 갑자기 오는 졸음으로 인해 큰 사고가 날 수 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증상이 나타났을 때 치료해야 한다. 현재 기면증을 완치할 방법은 없으며, 오직 증상 관리만이 가능하다.
 
이처럼 많은 기면증 환자가 일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콘텐츠에서는 기면증 환자를 '예능'으로 소비하고 있다.
 
연구팀이 1983년부터 2025년 사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및 TV 드라마 중 '기면증' '기면증 환자'를 언급한 56편(영화 15편, 드라마 41편)을 분석한 결과, 이중 코미디 장르는 '절반 미만'이었으나 80%가 기면증을 반복적인 개그 소재로 사용했다.
 
등장인물이 묘사된 34개 작품 중 82%는 실제 기면증 증상과는 다르게 극적으로 쓰러지는 형태의 과장된 '수면 발작'을 포함하고 있었다. 과도한 주간 졸림, 탈력발작, 수면 전후의 생생한 환각, 수면 마비 등 기면증의 일반적인 증상은 이러한 묘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노 브레인 레이스'(Rat Race)의 주인공 엔리코는 사람들로 붐비는 로비를 가로질러 뛰어가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눈을 감고는 꼿꼿이 선 자세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은 잠든 상태에서 자세를 유지하는 능력을 잃기 전까지 아주 잠깐만 서 있을 수 있을 뿐, 생물학적으로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역시 잘못된 기면증 묘사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The Simpson)에서 기면증 진단을 받은 호머 심슨.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공식 유튜브 채널 '리사 심슨'(@lisasimpson6694) 영상 캡처

진단 및 치료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한 작품 역시 수면 장애 인식 제고에 힘쓰는 환자 옹호 비영리 단체인 '프로젝트 슬립'과 협업한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뿐인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기면증 환자로 묘사된 41명의 등장인물 중 68%는 무능하거나 믿을 수 없는 인물로 그려냈다.
 
영화 '물랑 루즈'(감독 바즈 루어만)에는 이름도 없이 '기면증이 있는 아르헨티나인'이라는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기면증으로 인해 예술 활동에 지장을 받는 것은 물론 몇몇 장면에서는 그가 무능하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러한 묘사에서 벗어난 작품은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베네딕트 비밀 클럽'(The Mysterious Benedict Society)다. 작품 속 두 명의 기면증 환자는 모두 지적이고 유능한 인물로 묘사됐다.
 
연구팀은 "기면증 환자는 종종 게으르거나 부주의하다는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기도 하며, 이로 인해 타인에게 자신의 질환을 알리기를 꺼리기도 한다"며 "실제로 기면증 환자들은 주류 미디어의 부정확한 묘사로 인해 진단이나 치료를 받는 시기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종종 언급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미디어가 고정관념에 치우치거나 부정확한 묘사는 낙인을 심화시키고 수용자의 도움 요청 행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미디어는 기면증을 농담거리로 삼아선 안 된다. 또한 게으르거나 무능하다는 고정관념을 피하고, 기면증의 진단과 치료 과정을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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