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간다."
차량 밖으로 던져진 빈 과자 비닐봉지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치솟는다. 잠시 허공을 떠돌던 텅 빈 봉지는 자동차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 어딘가로 떨어진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날아오르던 껍데기의 마지막 비행은 그렇게 끝난다.
이창동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가능한 사랑'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한때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지만, 이제는 비어버린 존재로 영화는 이 빈 봉지를 통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인물들의 결핍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갑작스러운 해고로 삶이 뒤틀린 노동자 부부와 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 감독, 그리고 이를 목적과 효율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본가를 한자리에 놓는다.
이들은 각자의 결핍과 욕망을 드러내고 영화는 이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들여다본다.
SP중공업의 갑작스러운 구조조정에 맞서 가족 모두 파업에 나섰다가 해고된 최호석(설경구)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과거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회사를 향하기보다 어려운 순간 자신에게 등을 돌린 동료들에게 향한다.
아내 안미옥(전도연)도 해고 노동자 가족들의 비극을 지켜보며 상처를 입지만, 정작 자신의 주변에 있는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감독 이예지(조여정) 역시 노동자 개인의 삶을 하나의 스토리텔링 도구로 바라본다. 이 때문에 이예지가 두른 값비싼 허울은 인터뷰 과정에서 등장하는 "해고는 살인이다"는 문구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런 이예지를 바라보는 자본가 한상우(조인성)는 아내에게 묻는다.
"저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려고 훌륭하게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잖아. 너하고 저 사람들은 다르잖아. 같다고 믿는 거 잖아." -한상우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는 거야." -이예지
'귀족 노조'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힌 해고 노동자들
영화는 각자의 자리에 머물던 인물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과거에 붙잡혀 있던 최호석은 외면해 왔던 분노와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 당장의 일상을 중요하게 여기던 안미옥은 노동조합을 설립하며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 '만인의 연인'으로 불렸지만 정작 푼수 같은 매력에 끌렸던 한상우도 점차 안미옥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던 이예지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해고 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짚어낸다.
SP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은 심리치료 과정에서 직장에 남은 이들을 이른바 '산 자', 해고된 자신들을 '죽은 자'라고 부르며 각자의 상처를 털어놓는다.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짓밟힌 기억, 특정 언론으로부터 '귀족 노조'라는 비판을 받다가 어느 순간 '빨갱이'라는 낙인까지 찍힌 현실도 언급된다.
영화 속 사건은 2009년 대규모 구조조정에 반발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연출을 맡은 이창동 감독은 해당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영화에는 서세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저 달이 차기 전에'(2009) 속 당시 쌍용차 파업 현장의 강제진압 장면 일부가 활용됐다.
바닷속 자유의 몸짓…"우리 세계 복잡한 모습 갖추고 있어"
영화 곳곳에는 인물들의 결핍과 욕망이 상징적으로 배치됐다.
해고의 후유증에 짓눌린 최호석은 분노와 슬픔을 쏟아내다 결국 공허와 상실을 마주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죽은 유령"이라고 외치며 눈물을 보이고 안미옥은 그런 남편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자신과 남편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이예지의 카메라를 의식한 안미옥은 결국 한상우만의 공간인 바다로 들어간다. 나체로 바다를 헤엄치는 그의 모습은 자유를 만끽하려는 몸짓으로 드러난다. 한상우는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안미옥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별장에 놓인 호루라기도 인물에 따라 의미를 갖는다. 한상우에게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물건이지만, 강제진압의 기억을 가진 최호석에게는 공권력의 공포를 환기한다. 관리인의 호출을 목격한 안미옥에게는 가난이 대물림되는 상황과 맞닿아 있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최호석·안미옥 부부의 아들 최철(정섶)은 두 부부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찰자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은 영화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위치와도 겹친다.
한때 최호석의 내면을 상징했던 보름달은 해고의 후유증으로 공허와 상실에 잠식된 그의 내면과 달리 어둠 속에서도 온전히 빛을 낸다. 이를 통해 영화는 상처와 결핍 속에서도 이들 부부 내면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의지와 변화의 가능성까지 함께 보여준다.
영화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문구로 시작돼 해고 노동자, 계급 간의 갈등 등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묻는다.
여기에 설경구, 전도연, 조여정, 조인성 등 배우들의 열연 또한 작품의 설득력을 높이며 164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이창동 감독은 작품 메시지에 대해 "해고 노동자 얘기 같기도 하고 계급 간의 갈등 같기도 하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윤리와 태도와 관련된 얘기 같기도 하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여러 층위에서 복잡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걸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10여 년 전에 어떤 대기업에서 갑자기 대량 해고를 하고 파업, 강제진압과 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충격이었다"며 "이 내용을 이야기로 다뤄보고 싶어 준비했다가 제 확신이 없어 접었는데 극 중 예지의 정체성을 통해 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넷플릭스 영화 '가능한 사랑'. 이창동 감독 연출. 설경구·전도연·조여정·조인성. 164분. 청소년관람불가
한줄평: '코끼리'는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