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목회자로서 이런 현상에 주목하는 까닭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양심을 속인 도덕적〮 윤리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기 전에 사실 여부를 면밀히 확인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혹시, 내가 사실을 오해해서 상대방의 인격과 삶을 짓밟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도덕적 민감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십계명 중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을 주신 이유도 하나님 형상으로 만든 인간에 대한 존중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확인도 없고, 또한 자신의 확증편향에 의해 특정인이나 특정단체를 매도하는 것은 인격살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법적 범죄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죄악이다. 당한 사람이 갖는 억울함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둘째, 이런 혐오현상이 갖는 사회적 위험성 때문이다. 『혐오를 넘어 관용으로』 (김용환 등 공저)라는 책에 보면, 혐오주의는 세 단계를 거친다. 먼저 감정이 신념으로 굳어진다. '진보적이라 불편하다'는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 '저들은 적그리스도의 도구다'라는 신념으로 확장된다. 다음으로 속성이 본질로 둔갑한다. 특정 사건 하나, 관계자 한 사람의 발언을 근거로 '이 단체 자체가 변질되었다'고 규정해 버린다. 마지막으로 침묵이 강요된다. 팩트를 말하는 이들조차 '진영을 배신했다'는 낙인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 이 논리구조 안에서는 사실 확인보다 진영의 순도 검증이 우선한다.
더 아픈 지점은 이런 혐오와 배제 정서가 그 누구보다 화해와 용서, 상생을 설파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 그것도 목회자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한국교회는 한 때 반공의 보루처럼 인식되었는데, 그것이 이제는 혐오와 배제라는 정서의 보루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배타적인 집단으로 인식되며 사회적 신뢰를 점점 상실해 가고, 이로 인해 선교의 교두보를 잃어 가고 있다.
혐오와 배제는 절대로, 정통 기독교의 방식이 아니다. 잘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스토트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지성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아니라 지성을 경계하고 정죄하는 근본주의의 사고 회로다. 근본주의는 언제나 스스로를 정통이라 부르고,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끊임없이 딱지를 붙여 혐오하고 배제하고 추방하려고 한다. 이것은 극우적 사고의 교회 버전이며, 복음이 아니라 진영이 최종 권위가 되어버린 상태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 세리와, 창녀와 대화하셨다. 대화를 끊는 것이야말로 복음적이지 않은 태도다.
한국교회는 특정이념과 사상의 온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화해와 상생의 생태계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강단이나 유튜브나 인터넷 매체에서 특정 단체나 인물을 공격할 때는 최소한의 사실 확인을 거쳐야 한다. 설교는 팩트체크의 예외 지대가 아니다. (필자는 잘못된 팩트가 발견되면 그 다음 주 강단에서 시정조치한다). 강단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무거운 권위의 장이기에 더욱 진실에 입각해야 한다.
둘째, 신학적 차이를 곧장 신앙의 순도 문제로 치환하지 않는 성숙함이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 했다. 비본질적인 것을 놓고 차이를 말하지 말자. 건강한 생태계는 종의 다양성이 확보되어 있는 곳이다. 다르게 생각하는 형제자매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복음에서 멀어진다.
혐오주의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하나님 나라의 정반대 풍경이다. 온갖 가짜뉴스로 갈라진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확성기가 아니라, 사실 앞에 정직하고 다름 앞에 관대한 작은 용기들이다. 그 용기들이 모일 때, 비로소 화해의 생태계가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