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소설 '위험한 관계'에 집중했다. 고전이 지닌 품격과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에 매료됐고, 이를 2026년의 이야기로 새롭게 풀어내고자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캔들'을 연출한 정지우 감독은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작품 연출 방향과 원작을 재해석한 과정을 밝혔다.
"원작 소설이 주는 매력이 있었어요. 인물의 가스라이팅으로 보일 만한 해석이 재미있었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했죠."
이어 "조선시대 후반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해 시대가 맹렬하게 변화하고 있었다"며 "변화의 주역들이 여러 층위의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2026년도에 만들 만한 이야기라고 봤다"고 덧붙였다.
'스캔들'은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1782)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인물들의 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어 하나의 관계 균열이 결국 모든 인물의 파멸로 이끈다. 정 감독도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과 관계의 미묘한 변화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끌어갔다.
정 감독은 "인물의 내면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시청자들에게 보여드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며 "인물의 모호함을 따라가면서 촘촘하게 보게끔 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구체적이고 명확한 관계였다면 (전개가) 더 빨라졌겠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불균형해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배우들에게도 구체적인 키워드를 주는 것보다도 소화할 시간을 기다려주면 마술 같은 순간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현장에서 정 감독을 놀라게 한 순간도 있었다. 8회에서 조씨부인 조윤(손예진)과 조원(지창욱), 희연(나나)이 한 자리에 모인 장면이다.
그는 "조원의 표정은 정말 연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며 "누이 앞에서 뭐라고 편하게 말할 수도 없는 곤란함과 난처함이 담겼다"고 강조했다.
극 중 인물에 대한 해석도 설명했다. 정 감독은 조윤에 대해 "남다른 재능 이면의 게으름과 오만이라는 그림자가 있다"며 "그 오만함으로 정말 쓸쓸하게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희연에 대해 "원작 소설에서도 여성성이 넘치는 인물"이라며 "당시 사회가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는데 살고 싶은 의지와 살아남으려는 힘을 가진 인물로 만드려고 했다"고 전했다.
작품 초반 유독 위축된 모습으로 보여진 것에 대해서는 "죽는 게 명예롭다고 생각하는 당시 상황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며 "시어머니가 집에 다녀오라는 말 자체가 가서 죽으라는 의미인데 인물이 처한 어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희연이 처한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세트 지붕을 의도적으로 낮췄고 무채색으로 만들었다"며 "그 큰 사람을 넣으면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 울음소리는…" 조선시대 후반의 시대 변화 담아내
작품 곳곳에는 판소리의 모습이 담겼다. 정 감독은 연출을 맡기 전부터 판소리를 활용한다는 기획안을 전달받았단다.
"판소리에 감정적인 경험이 있었던 사람이어서 제게 너무 유혹적이었죠. 한번 해보고 싶다는 오랜 꿈이 있었는데, 판소리로 열고 판소리로 닫는 판소리 한마당을 만들었죠.(웃음)"
이어 "오히려 판소리가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회 넣어보려고도 했다"며 "판소리를 각 나라 가수들이 부른 버전이 넷플릭스에서 있는데 이 아이디어가 재미있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후반의 시대 변화도 작품 곳곳에 녹였다. 색안경과 자명종 등 당시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 문물을 비롯해 애벌레와 명주실 등을 통해 시대상을 보여주려 했다.
정 감독은 "제 애착벌레다. 어떻게든 끼고 찍어보려고 했다"며 "가내수공업으로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치고 실을 만들어 직조한 뒤 옷을 만들어 입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조씨부인의 집안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기록에서 '한여름에 애벌레가 뽕잎 먹는 소리가 비 내리는 소리 같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라는 글귀를 들은 적이 있었다"며 "화성 축조가 이뤄지고 생산성이 발전하기 시작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벌이 등장하는 장면에도 시대적 의미를 담았다. 정 감독은 "당시 북촌에는 권력을 잡은 계파가 주로 살면서 난개발이 이뤄졌다"며 "골목과 골목이 엉켜있는 북촌의 풍경을 그리고자 했다. 골목이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지만 못 본 척, 못 들은 척한 상태로 이야기가 넘나들게 했다"고 덧붙였다.
소 울음소리도 시대적 배경을 살리기 위한 장치였다. 그는 "당시 집에는 교통수단으로 말이 있었고 소, 닭 등 여러 가축이 있었다"며 "장면에 담으려고 했는데 쉽지 않아서 소리를 집어넣었다. 날아다니는 닭은 전부 CG"라고 웃었다.
대사 수정에도 시대적 고증과 현대적인 접근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 정 감독은 "사극 어투라는 정확한 개념 규정이 있더라"며 "어린 친구들이나 하층민은 퓨전 사극처럼 현대어를 쓰고 중년 이상의 인물은 전통 사극 어투를 사용하는 식으로 섞어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손예진의 슈퍼파워, 지창욱의 다정함, 나나 날것의 감정"
이번 작품을 함께한 배우들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정 감독은 손예진에 대해 "인물을 쥐는 힘이 슈퍼파워 같았다"며 "새롭게 만들어진 조씨부인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배우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창욱에 대해 "마초적인 이미지가 아니어서 좋았다. 섬세하면서도 다정함을 가지고 있다"며 "조씨부인에게 받은 상처를 표현하는 조원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봤다"고 말했다.
이어 "원작의 발몽 자작보다 유머러스하다"며 "휘청휘청하면서 세상을 응대하다가 송곳같이 예민하게 나오는데 말까지 잘 타더라. 이게 한 사람 안에서 다 이뤄지는 게 조금 지나치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나나에 대해서는 "날것의 감정 연기가 극 중 희연이 살고 싶어하는 힘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두고 끝까지 고심했다고 한다. 정 감독은 "원작 소설에는 사랑으로 배신당한 인물이 죽지만 저는 2026년에 만드는 시리즈로써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며 "사실 나나 배우도 죽고 싶어했지만 보란 듯이 살아남겠다라고 선언하는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칠성 역의 권도균과 은실 역의 김지안에 대해서는 "근본 없는 인물이었지만 우리 작품의 유일한 해피엔딩 커플"이라며 "이들의 사랑은 가축처럼 시작했지만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진정한 사랑의 성취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끝으로 정 감독은 작품 메시지에 대해 전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전부 다 자기 의지를 피력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요. 모든 인물이 자기 주도성을 가지고 있죠. 결국 인물들은 흔적을 남기는 '먹'이었어요."
'스캔들'은 공개 2주 차에 280만 시청수(시청 시간을 작품의 총 러닝타임으로 나눈 값)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쇼 비영어 부문 3위에 오르는 등 눈길을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