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기술탈취·특허침해 소송에서 증거 확보를 돕기 위해 도입된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K-디스커버리)'가 시행도 되기 전에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개정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에 신설된 '변호사 비밀유지권' 조항이 대기업의 증거 제출 거부 수단으로 악용돼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술탈취 피해 구제법에 '변호사 비밀유지권' 납득 어려워"
4일 업계에 따르면 K-디스커버리는 기술탈취·특허침해 소송에서 대부분의 증거가 가해자 일방에게 쏠려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피해자가 소송에서 제대로 다퉈볼 수 있게 하기 위해, 법원이 전문가를 지정해 필요한 조사를 하는 한국형 증거수집제도다.지난 1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 개정으로 도입된 K-디스커버리는 기술자료 유용행위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 기업이 상대방이 보유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미국의 디스커버리(Discovery)와 독일의 전문가 사실조사(Inspection)를 참고해 마련됐다.
신청인의 요청으로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당사자의 사무실과 공장 등을 방문해 자료를 열람·조사하고, 법원이 그 결과를 증거로 인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상생협력법 제40조의7은 변호사법 제26조의2의 '의사교환 내용 또는 서류·자료'를 전문가의 조사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 자료로 명시했다. 변호사가 소송 또는 조사를 위해 작성한 서류나 자료도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기술탈취나 특허침해 피해 구제를 위한 법에 변호사 비밀유지권 규정을 별도로 넣은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재단법인 경청은 "대기업들은 사내 변호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술탈취 및 손해배상과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를 변호사 비밀유지권으로 지정해 놓을 것"이라며 "기술탈취와 관련된 핵심 자료가 변호사 비밀유지권이라는 이유로 기술탈취 사실 조사에서 빠질 게 불 보듯 뻔하다"고 우려했다.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 것…필요성의 예외 규정 둬야"
경청 관계자는 "대형 로펌들이 상생협력법에 도입된 K-디스커버리에 대한 시사점으로 '변호사 비밀유지권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든 것이 이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며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어 기술탈취 피해 중소기업들이 염원하던 입법 취지를 무력화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라고 말했다.
경청은 약자인 피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이라면 비밀유지권을 광범위하게 보장하기보다 예외를 규정하는 것이 입법 취지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지적은 변호사 비밀유지권의 입법 과정에서도 제기됐었다.
지난해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관련 변호사법 개정안을 심사할 당시 법무부는 비밀유지권이 변호사법에 도입되면 민사소송에도 적용되는 만큼, 민사 분야에서 추진될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까지 고려해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의 경우를 참고해 변호사가 소송을 준비하며 작성한 자료는 원칙적으로 보호하되, 자료 공개에 상당한 필요성이 있는 경우 등에는 예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필요성의 예외'를 변호사법에 두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는 법무부가 제안한 필요성의 예외가 변호사의 비밀유지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변호사법 개정안에서 제외했다.
문제는 한국형 디스커버리를 도입한 상생협력법이 변호사법상 비밀유지권을 그대로 원용하면서도 법무부가 제안했던 '필요성의 예외'와 같은 업무성과물 공개 기준을 별도로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상생협력법은 변호사 비밀유지권이 인정되는 자료를 원칙적으로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는 구조여서 중요 증거가 비밀유지권에 가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자료제출 거부해도 판단 규정 없어…"법 보완 필요"
당사자가 자료 제출을 거부할 경우 법원이 어떻게 판단하고 처리할지에 대한 규정이 없는 점도 논란이다.상생협력법은 당사자가 변호사 비밀유지권을 주장하는 자료가 실제 보호 대상인지 확인하기 위해 법원이 자료 목록의 제출을 명하고, 필요하면 자료 자체도 비공개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목록이나 자료를 끝내 제출하지 않을 경우 법원이 비밀유지권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겠다는 규정이 없다.
이와 함께 법원이 자료 제출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피해 기업이 법원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피해 기업의 이의 제기가 있어야 법원이 제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어렵게 도입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변호사 비밀유지권 조항으로 인해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중소벤처기업부는 법원이 목록이나 자료 제출을 명령했음에도 당사자가 제출하지 않을 경우 법원이 비밀유지권 대상으로 인정할 근거가 없어 해당 자료를 전문가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을 것이란 입장이다.
또 당사자가 해당 자료 제출을 계속 거부할 경우 법상 조사 거부·방해에 따른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될 수 있고, 법원이 피해 기업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피해 기업의 증거 확보를 돕기 위한 제도에 변호사 비밀유지권 조항이 들어가면서 피해 기업의 증거 확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청 관계자는 "죄를 지어도 처벌은 약하게, 죄지은 자의 방어권은 강하게 하는 법은 반드시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곱씹어야 한다"며 "정부는 이제라도 힘없는 자들의 아우성을 외면하지 말고 더 경청하고 토론해 잘못된 법은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