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프로배구 대한항공의 베테랑 미들블로커 조재영이 프로 데뷔 이후 한 팀에서만 14번째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창단 첫 우승부터 6번의 챔피언결정전 정상까지 대한항공의 왕조 구축을 함께해 온 그는 이번 비시즌 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 일본제철 사카이체육관에서 취재진과 만나 그간의 소회와 앞으로의 각오를 밝혔다.
2013년 프로에 데뷔한 조재영은 줄곧 대한항공의 푸른 유니폼만 입어온 '원클럽맨'이다. 그는 "이렇게까지 배구를 오래할 줄 몰랐다. 지금까지 선수로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대한항공에는 원클럽맨이 많지 않다 보니 그런 부분에서 자부심이 더 크다"고 소감을 전했다.
13년 전 입단 당시와 비교했을 때 팀의 가장 큰 변화로는 '자유와 책임'을 꼽았다. 조재영은 "입단 당시에는 엄격함 속에서 훈련했다면 지금은 자유 속에 엄격함이 녹아 있다는 느낌"이라며 "선수 개개인의 책임감이 커지면서 더 프로다워졌고 그만큼 자유도 주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반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존재로는 주저 없이 세터 한선수를 꼽으며 "선수 형이 있기 때문에 대한항공이 변함없이 강팀인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누구보다 많은 우승을 경험한 그이지만,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정상에 서지 못했던 아픔이다. 조재영은 "챔피언결정전에서 이기고 시즌을 마치는 것과 지고 끝내는 건 분위기가 하늘과 땅 차이"라며 "우승했을 때는 연봉 협상에도 웃으면서 들어가지만 졌을 때는 삭막함 뿐이다"라고 회상했다.
특히 단상 밑에서 우승팀을 향해 박수를 보내야 했던 순간을 언급하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3등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며 "그런 경험을 많이 했던 선수 형, 지석이 등과 함께 '이런 자리와 분위기는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 무조건 우승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털어놨다.
조재영의 배구 인생에서 한선수는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존재다. 프로 입단 당시 포지션은 세터였으나, 팀 내에 완고한 벽이었던 한선수를 넘기 어렵다고 판단해 미들블로커로 전향했다. 그는 "이 팀에서 선수 형을 뛰어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며 "선수 형이 많이 도와줘서 처음 접한 포지션인데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선수 형은 나에게 '귀인' 같은 존재"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실제로 한선수는 최고의 '훈련 파트너'였다. 조재영은 "선수 형이 '내가 만들어 줄 테니 너는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며 "미들블로커는 블로킹과 공격이 모두 중요한데 최고의 세터가 토스를 해주니 공격에서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블로킹에서도 선수 형의 토스를 계속 따라가면서 상대 세터의 움직임이나 공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많이 늘었다"고 덧붙였다.
물론 포지션 전향 과정이 평탄치만은 않았다. 당시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고 표현한 조재영은 "잘하는 미들블로커 선배들도 많았고 후배들도 많았다. 웬만큼 훈련해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며 "아침, 점심, 야간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몇 타임이 됐든 계속 훈련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것 같다"고 떠올렸다.
'무릎 도가니'를 갈아 넣는 노력이 만든 포지션 변경은 그의 선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조재영은 "계속 세터를 했다면 이 팀 저 팀을 다니다가 은퇴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팬들이 기억할 수 있는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걸 보면 포지션을 바꾼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세터 시절 쌓은 경험은 미들블로커로서 큰 무기가 됐다. 다음 공에 대비하는 준비 동작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직접 토스를 올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이 장점이 극적으로 빛을 발한 순간이 바로 2023~2024시즌 챔피언결정전 3차전이었다. 원포인트 블로커로 투입된 조재영은 마지막 챔피언십 포인트에서 김민재에게 재치 있는 속공 토스를 올렸고, 이를 득점으로 연결한 대한항공은 통합 4연패를 달성했다.
조재영은 "원래는 (임)동혁이에게 올라가야 하는 공이었다. 그런데 평소 (김)민재와 장난처럼 속공을 많이 맞춰봤는데 그 순간에는 왠지 민재에게 주면 될 것 같은 느낌이 딱 왔다"며 "주저하지 않고 올렸는데 내 손에서 시작된 공이 챔피언십 포인트로 이어졌다는 게 굉장히 기분 좋은 경험으로 남아 있다"고 미소 지었다.
어느덧 팀 내 고참 반열에 오른 그는 책임감도 다지고 있다. 조재영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곽)승석이 형이 있었고 그전에는 (김)성민이 형, (유)광우 형도 있었다. 올해 세 번째가 되니 확 와닿는다"며 "이제는 지석이를 도와주려고 한다. 형들이 했던 것처럼 해줄 이야기도 있고 팀 분위기를 잡는 데도 거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 다시 FA 자격을 얻었으나 잔류를 택한 조재영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는 "이 선수는 이제 나이도 있고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고 싶다. 그래서 비시즌에도 체중을 감량하는 등 계속 노력하고 있다"며 "아직도 발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