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말고 훈맹정음?…여섯 점이 연 또 다른 한글 100년

[현장EN:]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7일 개막
박두성의 한글 점자부터 권리·소통의 역사까지 100년 조명

박두성이 1926년 창제 반포한 '훙맹정음'. 김민수 기자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코 없는 코끼리 한 마리다. 엄정순 작가의 촉각 미술품 '코 없는 코끼리 no.7'. 작품 앞에는 긴 설명 대신 손으로 직접 만져보라는 안내가 놓였다.

6일 인천 연수구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열린 2026년 하반기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 기자간담회 현장. 전시는 눈으로 보는 데 익숙한 관람객에게 처음부터 다른 감각을 요구했다. 코끼리의 형태를 손끝으로 더듬고 바닥의 질감과 벽면 손잡이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오는 7일 개막하는 이번 전시는 송암 박두성(1888~1963)이 1926년 11월 4일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반포한 지 100년을 맞아 마련됐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 송암점자도서관이 공동 개최하며 내년 2월 14일까지 이어진다.

김명인 국립세계문자박물관장은 "이번 전시가 단순히 점자 창제 100년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점자를 통해 시각장애인이 배움과 기록, 사회 참여의 권리를 넓혀온 과정을 되짚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소외된 이들의 문제까지 돌아보자는 취지다.

전시는 한 점에서 시작해 '포용·연결·소통'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따라 구성됐다. 전체 공간도 6점식 점자에서 착안해 여섯 구역으로 나눴다. 손잡이와 바닥 재질, 색상 대비를 활용해 시각장애인도 동선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고, 모든 설명문과 작품 이름에는 점자를 병기했다.

'코 없는 코끼리' no.7'. 김민수 기자
첫 번째 본 전시 공간에서는 점자의 뿌리를 따라 프랑스로 향한다.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운 프랑스 교육자 발랑탱 아위(1745~1822)가 1786년 펴낸 '시각장애인 교육에 관한 시론'을 비롯해 샤를 바르비에의 12점식 점자판, 루이 브라유의 6점식 점자판 등이 전시됐다.

특히 '시각장애인 교육에 관한 시론'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자료다. 전시 관계자는 "확인한 바로는 프랑스에서도 전시된 적이 없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손으로 읽는 돌출 문자를 통해 시각장애인 교육의 가능성을 제시한 초기 기록이다.

전시의 중심은 박두성이 만든 훈맹정음이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박두성은 1913년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부임한 뒤 일본어 점자로만 공부해야 했던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한글에 맞는 점자 체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23년 제자들과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꾸렸고, 여러 안을 시험한 끝에 1926년 훈맹정음을 완성했다.

그가 세운 원칙은 간결했다. 점의 수가 적고, 배우기 쉽고, 서로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글의 초성·중성·종성을 구분하고 자주 쓰는 글자는 약자로 만들었다. 당시 정리한 자음과 모음 체계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훈맹정음 점자표를 비롯해 '한글 점자 쓰는 법', 박두성이 점자 인쇄 원판 제작에 사용한 1933년 제판기, 점자 타자기 등 국가등록문화유산 11점도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 자료는 2020년 시각장애인 관련 자료로는 처음 국가등록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6일 인천 연수구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7일부터 열리는 2026 하반기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 참석자들이 직접 점자 체험을 해보고 있다. 김민수 기자
6일 인천 연수구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7일부터 열리는 2026 하반기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 참석자들이 직접 점자 체험을 해보고 있다. 김민수 기자

훈맹정음의 역사는 글자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박두성은 전국 시각장애인에게 점자판과 종이, 교재를 우편으로 보내며 통신교육을 했다. 대한맹인사업협회가 1940년대 펴낸 '앞 못 보는 이와 그의 친구들에게 드림'에는 점자 통신교육과 시각장애인 교육의 필요성이 담겨 있다.

박두성은 점자 자료의 우편요금을 면제해 달라고 건의했고, 시각장애인도 점자로 투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등 사회적 권리 확대에도 힘썼다.

전시가 후반으로 갈수록 초점도 '문자'에서 '권리'로 넓어진다.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배우고 기록하는 수단이 됐고, 교육과 독서, 투표 등 사회 참여의 영역을 넓혀가는 도구가 됐다.

현장에서는 기자들도 직접 점자를 써봤다. 점자판에 종이를 끼운 뒤 점필로 글자를 새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찍은 뒤 종이를 뒤집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몇 글자만 적어도 익숙한 문자와는 전혀 다른 손의 움직임이 필요했다.

6일 인천 연수구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7일부터 열리는 2026 하반기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 참석자들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김민수 기자

구단비 학예사는 "이번 전시의 메시지는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세상'"이라며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점자를 직접 만지고 경험하며 문자와 접근성의 의미를 생각해보길 바랐다"고 말했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점자판과 점필로 감상을 남길 수 있다. 눈으로 시작했던 전시는 결국 손끝에서 끝난다.

김 관장은 "훈맹정음은 여섯 개의 점으로 시각장애인에게 읽고 쓸 권리를 돌려준 문자"라며 "누구나 손끝과 귀로도 문자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추천기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