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80년 아테네를 칭공한 페르시아의 군주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신화가 깃든 파르테논 신전을 깡그리 불태웠다. 1099년 고토 회복을 다짐하며 원정에 나선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알 악사 이슬람 모스크를 마구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탈레반은 기원 6세기 간다라 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바미얀 입석 불상들을 모조리 폭파해 가루로 만들었다. 일제도 조선에 비슷한 피해를 주었다. 조선 왕조의 정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고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만들었다. 단군 사당을 철거하고 전국 곳곳에 일본 신사를 세웠다.
이처럼 전쟁에서 상대방의 신전이나 신화, 성역과 유산을 욕보이고 파괴하는 행위는 많았다. 상대방이 절대시하는 신과 믿음, 가치 등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심리까지 굴복시켜 패배를 내면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상징적 폭력은 직접적 폭력만큼이나 유혹이 크다.
지금 한국의 보수 우파들에게 박정희 일가는 신화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가난과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민족중흥의 영웅'이다. 육영수 여사는 서민의 눈물을 조용히 닦아준 '국모'다. 두 사람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흉탄에 부모를 잃고 정치적 탄압과 피습을 받고도 쓰러지지 않은 '불사조'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 박 전 대통령 일가의 신화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대구역 광장을 비롯해 곳곳에 박정희 동상이 서있다. 그의 고향 구미시에는 새마을과까지 남아 있다. 새마을문고와 새마을협의회 등을 운영하는 조직이란다.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강제로 동네 청소에 나서야 했던 70년대 국민학교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절대적 신화를 믿는 이들은 일말의 의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신화에 대한 문제 제기를 전쟁 행위로 받아들인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영화 '암살자(들)'이 대표적 사례다. 이 영화는 지난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삼아 당시 취재 기자의 시각으로 수사 과정 상의 석연치 않은 점들을 파헤친 일종의 팩션(사실을 소재로 한 허구) 영화다. 보수 우파는 역사 날조라고 강력 반발하고 있다.영화계에서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창작의 자유라고 반박하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좌파를 상대로 '문화 전쟁'ㅇ를 실제로 언급하기도 했다. 국민의힘은 이 영화를 초청한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측에도 '상영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논란은 영화계 밖으로도 번지고 있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과 국민의힘 김태규 의원 등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을 꺼내 들었고 이에 더불어민주당이 발끈하며 여야 정치권으로까지 불길이 번지고 있다.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은 일찌감치 '5.18이 성역화돼서는 안된다'며 진보 세력의 역린을 수시로 건드려 왔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구의 신화가 타당한가를 따지는 게 아니다. 따지는 방식이 중요하다. 이성적이고 일관되게 품격을 갖추고 따지는 게 필요하다. 상대방의 문제 제기에 논리적인 근거로 반박하면 될 일이다. 상대방 신화를 끌어들여 조롱하고 모욕하는 방식으로는 논란이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또 다른 논란을 낳을 뿐이다. 상대를 위협하고 겁박하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을 하자는 짓이다. 특히 배우들의 집까지 찾아가 욕설 집회를 하는 행태는 형사 처벌감이 될 수도 있다. 자국의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고 국회의원들이 국제 영화제에 집단 요구하는 행위도 국제적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한국은 아직도 계엄과 검열이 횡행하는 나라냐'는 조롱 말이다. 싱가포르국제영화제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이런 요구를 '창작의 자유'를 들어 이미 거부했다.
'5.18은 되지만 8.15는 안된다'는 내로남불식 행태는 더욱 위험하다. 두 사건 모두 사법적 판단이 끝나기는 마찬가지다.그런데도 어제까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던 이들이 오늘은 창작의 자유를 논박하고 있다. 내일은 '언론의 자유'나 '집회 결사의 자유'가 논쟁으로 떠오를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영화 한 편을 둘러싼 논란은 논란으로 그쳐야 한다. 전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