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비는 서울 종로의 거리에서 영어 간판이 부쩍 늘었다. 한글 간판이 줄지어 있던 거리에도 편의점과 카페는 물론 한복점까지 영문 이름을 내걸고 있다.
최근 늘어난 외국인 손님을 끌기 위한 상인들의 선택이지만, 한글 간판으로 유명한 인사동 일대에서는 "고유한 거리 풍경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편의점부터 한복점까지…업종 가리지 않는 영문 간판
지난 6일 종로구 일대 거리는 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볐다. 찹쌀떡 가게 점원은 지나가는 일본인 관광객에게 "타베테미루(食べてみる·먹어 보세요)!"라고 외치며 손님을 끌었다. 단청이나 태극 문양 소품을 파는 기념품 가게 점원도 매장을 나서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해브 어 나이스 데이(Have a nice day)"라고 인사를 건넸다.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해마다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올해 1~8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역대 최고치인 1505만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1238만명)과 비교하면 21.6% 증가한 수치로, 연간 방한객 1500만명 돌파 시점을 한 달 이상 앞당겼다.
관광객이 늘면서 외국어 간판도 늘어나는 추세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지난 6일 종로구 새문안로 약 400m 구간에 있는 간판을 살펴봤다. 한글 간판 13개, 영문 간판 13개, 한자 간판 1개였다. 공공기관과 병원, 은행 등을 제외하면 영문 간판이 대부분이었다.
업종도 다양했다. 햄버거, 커피, 아이스크림 가게부터 편의점, 약국에서 까지 영어 간판을 달았다. 경복궁 인근 한복대여점조차 'K HanBok', 'HanBok Rental Shop'처럼 큰 글씨로 영어를 적었다.
"외국인 손님이 90%"…프랜차이즈도 영문 간판으로
상인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난 만큼 영어를 앞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경복궁 인근 한복대여점에서 일하는 이모(29)씨는 "손님 중 한국인은 10명 중 1명꼴"이라며 "일본, 중국뿐 아니라 서양권까지 정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온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영어 간판을 달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도 영문 간판으로 바꾸고 있다.
올리브영 광화문점은 지난해까지 한글 간판을 쓰다가 최근 영어 간판으로 교체했다. 매장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었기 때문이다. 올리브영 관계자는 "광화문점만 한글 간판이다 보니 일부 외국인은 유사 브랜드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배스킨라빈스 경복궁역점도 영문 간판으로 바꿨다.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한글 간판을 쓰던 매장이었다. SPC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매장은 2~3년 전 건물주 요청으로 간판을 교체했다. 지금은 영문을 중심에 두고 오른쪽에 한글을 함께 병기하고 있다.
반면 한글 간판을 유지하는 곳도 있다. GS25와 스타벅스는 인사동길 인근 매장에 한글 간판을 달았다.
GS리테일 관계자는 "인사동 일대 규제 때문에 한글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스타벅스코리아 관계자도 "종로 역사문화지구의 지역 특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두 기업 모두 현재로선 한글 간판 매장을 늘릴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시민들 "전통 지켜야" vs 관광객 "한글 혼란스럽기도"
8년째 인사동에서 금속 공방을 운영하는 김진희(42)씨도 같은 생각이다. 김씨는 "인사동에 젊은 손님이 늘었고, 영어가 더 멋있어 보인다는 인식도 있어 영어 간판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예전에 비하면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굉장히 잘한다. 응대할 때도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좋아할 정도"라며 "종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만큼 인사동을 넘어 외국어 간판을 제한해 전통을 지키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민들도 한글 간판이 줄어드는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경기 고양시 탄현동에서 온 20대 최혜린씨는 "예전보다 영어 간판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면서 "외국인들은 한국 정서를 즐기러 왔을 텐데 영어를 크게 써 놓으면 여기가 외국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강북구에서 온 강성희(52)씨는 "어르신 중에는 영어를 모르는 분이 많지 않나"라며 "외국인 관광객은 편할 수 있지만 한국인으로서는 영문 간판이 많으면 정신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관악구에 사는 문근우(24)씨도 "영어와 중국어 간판이 정말 많아져 아쉽다"며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한글만 써도 외국인들이 충분히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외국인 관광객들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에서 온 버나인(27)씨는 "한국에서 사흘째 여행 중인데 영문보다 한글 간판을 더 많이 봤다"고 말했다. 그는 "호텔 안에는 영어가 있어 괜찮은데, 밖으로 나오면 이쪽(인사동)은 전통적인 동네라 그런지 한글만 있다"며 "읽기 힘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멕시코에서 온 아말리아(20)씨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장소에는 한글만 있는 게 더 좋다"면서도 "관광객이 많은 지역에서는 영어가 있는 게 확실히 더 유용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로마자 배려 아냐… 한글이 K-경쟁력"
전문가들은 한글 간판이 한국의 문화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외국인의 불편은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취지다.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신지영 교수는 "외국인들은 한국적인 경험을 위해 관광을 오는 만큼 로마자 표기가 반드시 외국인들을 위한 게 아닐 수 있다"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불편함은 기술읕 통해 보완하는 게 관광 대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도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 대한 정보가 없어 로마자 표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글 사용을 적극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로마자를 너무 많이 쓰면 오히려 외국인들이 한국의 매력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정부의 역할도 강조했다. 그는 "상표를 영문으로 등록했더라도 국내에서는 한글을 가장 크게 쓰도록 정부가 책임지고 유도할 필요가 있다"며 "한글 사용을 늘려 거리 경관을 가꿔 나갈 때 우리나라의 문화 정체성이 강화된다"고 덧붙였다.
소형 간판은 신고 대상 제외…한글 병기 사각지대도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12조는 광고물의 문자를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하도록 하고,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종로구도 '한글 사랑 조례'를 두고 한글 사용을 촉진하고 있다. 조례 제9조는 경복궁 주변과 북촌한옥마을, 인사동길 등 보전 권역에서 "반드시 한글을 함께 써야 한다"고 정했다. 다만 상표법에 따라 등록된 상표·디자인 등에는 한글 병기 의무의 예외가 적용될 수 있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시정명령과 이행강제금 부과 등의 행정 조치를 받을 수 있다. 다만 실제 처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한글 병기 위반에 대해서는 우선 자진정비 기간을 주고 한글로 표기하도록 행정지도하고 있다"며 "한글 간판 사용을 장려하고 있지만 간판 수가 워낙 많다"고 밝혔다.
여기에 5㎡ 미만 간판은 단속 대상이 아니어서 한글을 병기하지 않아도 사실상 제재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