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미담이 많으시죠."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부국제) 영화의전당 인근 '뮤지엄 원(Museum 1)'. 고(故) 안성기 배우를 기리는 특별한 공간이 마련됐다.
전시장 입구에는 생전 안성기의 얼굴과 함께 '영화와 현대미술 안성기를 기리며'라는 문구의 포스터가 관람객을 맞이했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국제가 공동 기획한 이번 특별전은 故 안성기를 통해 한국 영화사의 한 단면을 재조명하는 융합형 전시다. 고인의 작품과 연기의 흔적을 회화와 조각, 설치미술, 인공지능(AI),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예술 언어로 풀어냈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을 비롯해 곽지수, 구본창, 김가람, 김수철, 나현, 단잠(김문정·손몽주·이동재), 박정혁, 조덕현, 차민영 등의 여러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장에는 부국제를 찾은 영화 팬부터 나들이에 나선 시민들까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어린 자녀와 함께 전시를 찾은 부모가 있는가 하면, 친구들과 작품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남기는 관객들도 있었다.
전시 초입에는 안성기의 영화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한 그는 70년 동안 17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사와 함께했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각 시대에 걸쳐 주연상을 받으며 한국 영화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는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2020년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이후 병이 재발해 치료에 전념했고 지난 1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공간을 지나면 김문정·손몽주 작가가 구성한 반투명 패브릭 공간이 펼쳐진다. 관람객은 빛에 따라 흩어지는 문장과 반복되는 공간을 지나가며 영화의 언어를 몸으로 경험한다. 한 배우의 삶을 되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남긴 영화의 대사를 감각적으로 마주하도록 한 공간이다.
구본창 작가는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꿈'(1990), '태백산맥'(1994), '축제'(1996) 등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의 스틸 사진을 대형 모니터에 담아냈다. 화면 속에는 작품마다 다른 얼굴과 분위기를 지닌 배우의 모습이 펼쳐진다.
흰머리가 성성한 70대 관람객 A씨는 "안성기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대부분 다 봤다"며 "1970년대에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고래사냥'(1984), '기쁜 우리 젊은 날' 보고, 나이 많이 들었을 때는 '라디오 스타'(2006)도 봤다"고 떠올렸다.
이어 "1970년대에는 TV가 있었어도 영화를 많이 봤었다. 1980년대, 1990년대 영화는 내가 돈을 벌어서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다"고 웃었다.
한 영화인도 "안성기 선배는 참 미담이 많으신 분"이라고 떠올렸다.
전시장 곳곳에는 안성기가 생전 입었던 의상부터 받은 트로피, 촬영용 의자 등 작품 활동의 흔적을 담은 자료들도 놓였다.
서진석 부산시립미술관 관장은 "한 배우에 대한 단순한 추모를 넘어 안성기라는 존재가 한국 영화사 안에서 축적해 온 시간과 서사를 동시대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내는 데 주목했다"고 밝혔다.
서 관장은 "안성기가 몸소 체험한 한국 영화계의 다양한 자료와 서사를 조사·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기억과 사회적 감각이 교차하는 다층적인 작업들을 선보였다"고 전했다.
이어 "이번 특별전은 영화와 미술의 관계를 단순한 협업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예술 언어가 시대의 감각과 기억을 어떻게 새롭게 생성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실험의 장이자 한국 시각문화의 예술적 지평을 넓혀가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덧붙였다.
전시 마지막에는 이이남 작가가 인공지능(AI)으로 제작한 영상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안성기가 생전에 남긴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가상의 대화를 구성했다.
이제는 직접 들을 수 없는 목소리와 생전의 말들이 영상 속에서 되살아나며 현재의 관람객에게 또 다른 만남을 선사한다.
"배우는 관객을 위해 연기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직업인입니다. 영화를 통해 사랑을 주셨으니 영화로 은혜를 갚고 보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드릴 수 있고,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작품을 만났으면 하고 매일 기도합니다" -2022년 9월 19일 안성기
이밖에 부국제에서도 특별기획 프로그램으로 '아름다운 시절, 안성기'를 통해 고인을 기리고 있다.
상영작은 이장호 감독의 영화 '바람불어 좋은날'(1980),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 '칠수와 만수'(1988),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1989),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1992), 임권택 감독의 '축제' 등 총 6편이다.
지난 6일 개막한 부국제는 오는 15일까지 59개국 316편의 작품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