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 피해를 호소한 아내가 별거 중인 남편으로부터 살해된 사건을 두고, 사건 발생 직전 피해자가 경찰의 연락에 응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현장 출동 등 조치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고위험군 피해자로 분류해 놓고도 "무응답에 따른 매뉴얼이 없다"는 이유로 출동하지 않은 현실을 두고 전문가는 피해자 보호 관련 제도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고위험군 피해자' 연락 두절에도 미조치…"매뉴얼 없어서"
16일 전북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13일 오후 5시 43분쯤 스토킹 피해자이자 안전 관리 대상인 A(70대)씨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전화를 걸었지만 A씨는 받지 않았다. 해당 시각은 A씨를 살해한 남편 B(70대)씨의 범행 시각으로 추정되는 13일 오후 5시 30분부터 7시 사이로, 경찰은 이 시간대에 B씨가 살해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A씨가 연락을 받지 않음에도, 그의 집을 방문해 안부를 확인하거나 연락을 다시 해보지 않았다. B씨의 범행 당일 A씨의 신변을 관리하기 위해 하루 두 차례 순찰에 나선 경찰관들도 A씨를 대면하지 않고 아파트 인근만을 둘러본 채 복귀했다.
'매뉴얼 부재'가 다시 연락을 취하거나 현장 확인 없이 상황을 종료한 이유였다. 통상적인 스토킹 피해자는 학대예방경찰관(APO)가 위험도에 따라 등급을 나눈 후, 월 1회 전화 통화나 대면 점검 등으로 피해자를 관리한다. 담당 수사관 또한 주 1회 전화 통화 등으로 피해자의 안부를 점검한다.
전화 무응답에 따른 대책이 없었기에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지만, A씨가 지속적으로 불안감과 두려움을 호소해왔다는 점에서 경찰의 판단이 안일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스토킹 등 8차례 신고해 위험 신호 충분…경찰 판단 안이했다
실제로 남편과 이혼 소송을 준비 중이던 A씨는 B씨가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반복해서 자신의 집을 찾아와 현관문을 부수거나 전화로 협박을 하는 등의 행위를 해 그를 가정폭력이나 스토킹으로 8차례 신고했다.
지난 9월엔 법원이 문자메시지로 지속적인 스토킹 행위를 한 B씨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고, 경찰은 A씨를 '고위험군 피해자'으로 분류해 관리했다. 보복을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경찰 스스로가 보복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과 더불어 지금껏 스토킹이 폭행이나 성폭력 등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꾸준히 제기돼 왔던 상황을 고려하면 경찰이 고위험군 피해자인 A씨의 전화 무응답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사전에 피해를 막을 수도 있었다.
지난 2021년 발표된 경찰대학 한민경 교수의 연구 논문 '법정에 선 스토킹 : 판결문에 나타난 스토킹 행위의 유형과 처벌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2013년 1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8년 동안 '스토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1심 판결 148건을 분석한 결과, 스토킹이 상해·폭행 등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진 경우는 35.8%(53건)에 달했다.
"가정 폭력과 스토킹 신고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응답 시 찾아가봤어야 하지 않냐"는 질의에 경찰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피해자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경우,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재연락을 시도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남겨놓는다"며 "추후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을 두고선 아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문가 "매뉴얼 마련만이 답 아냐…경찰에 모든 책임 지우는 제도 개선해야"
경찰의 실책을 두고 피해자 무응답시 현장 출동을 강제하라는 등의 지적이 나오지만, 전문가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순 매뉴얼 마련이 아닌 전체적인 제도 개선이라고 말한다.한민경 교수는 "경찰에게만 피해자 보호 조치의 모든 의무를 지우는 현행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경찰에게만 지워지는 피해자 보호 조치의 의무를 민간의 영역까지 확대해 성폭력 상담소 등 피해자 보호 기관이 직접 피해자의 안부를 확인하는 방안을 제기했다.
한 교수는 "스토킹 피해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아한다"며 "그런 상황에서 연락이 안된다고 경찰이 집이나 직장에 찾아오면 피해 사실을 알리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현행 제도 하에서 경찰은 피해자의 자택 주소나 위치 등 개인 정보를 민간 기관에 넘길 수 없어 모든 의무를 지고 있다"며 "민간 기관이 피해자의 정보를 받을 수 있게 개인정보보호법을 개정하면 경찰 조직과 피해자 본인의 부담이 다소 덜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스토킹 가해자의 유치나 전자 장치 부착 등 인신을 구속하는 것을 두고서도 경찰 권한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찰의 가해자 유치 신청 건수 중 인용률이 10%밖에 되지 않는다"며 "경찰이 신청하면 검찰이 청구하고, 법원이 발부하는 현행 제도 하에서 피해자 보호가 실질적으로 이뤄지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형사 절차가 아닌 피해자 보호 조치에 있어 경찰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