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 배우자 소득 합산 등으로 주거지원을 더이상 받지 못하고, 혼인신고 없이 출산하자니 출생신고서에 '혼인 외 출생자'가 명시되는 상황.
그간 '출산율 올리기'를 목표로 달렸던 정부가 결혼과 출산, 돌봄 전반에서 발생하는 불편을 개선해 '삶의 질'을 올리는 방향으로 새로운 인구전략을 내놨다. 구체적인 방안에선 당장 해소 가능한 '결혼 페널티'도 있지만, 변화된 가족 형태에 대한 법적 보호나 장시간 노동에 따른 돌봄 부담 등은 추가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지난 14일 인구전략 비전선포식에서 시민과 전문가들은 실생활과 거리감이 느껴지는 정부 인구정책의 사각지대를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했다.
주거지원 불이익·'혼인외 출산' 등 결혼 페널티 고친다
정부가 14일 발표한 제1차 국가인구전략 기본계획에는 결혼에 따른 주거지원 불이익을 해소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현재 디딤돌·버팀목대출과 보금자리론 등 정책대출은 혼인 이후 부부 합산소득이 기준을 초과하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정부는 부부 중 한 사람만 소득요건을 충족하더라도 정책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할 계획이다.
공공임대주택에 살던 미혼 청년이 결혼으로 소득·자산 기준을 초과하더라도 재계약을 허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다만 앞서 발표된 정부의 개선안은 재계약을 한 차례 허용하는 내용이어서 장기적인 주거지원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아동에 대한 제도적 차별도 개선 대상이다. 현행 출생신고서에는 자녀가 혼인 중에 태어났는지,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났는지를 구분하는 항목이 있다. 정부는 '혼인 외 출생자' 표기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서식을 개선하고 미혼부의 자녀 출생신고 절차도 정비할 계획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포식에서 혼인신고를 한 법적 부부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언급하면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많이 남아 있다"며 그 외의 가족을 비정상으로 보는 시선을 지적했다.
특히 "우리 사회는 미혼모라고 하면 좀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 않냐"며 "이 문제도 우리가 정면으로 맞닥뜨려서 뭔가 길을 열어줘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다만 1차 기본계획은 출생신고서의 표기를 바꾸는 것에서 나아가 다양한 가족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까진 아직 나아가지 못했다. 정부는 혼인이나 혈연관계에 한정하지 않고 생활과 돌봄을 함께하는 다양한 가족을 포용하기 위해 관련 법·제도 개선방안을 검토하기로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이돌봄 39일 대기"…지원제도 있어도 이용은 어려워
정부가 각종 양육 지원 정책을 제공하고 있지만 현실에 제대로 가 닿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아이돌봄 플랫폼 '맘시터'를 운영하는 정지예 맘편한세상 대표는 선포식에서 공공 아이돌봄 서비스를 신청해도 돌보미와 연결되기까지 평균 39일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정 대표는 5년 전엔 19일이었던 대기가 최근 두 배 이상 길어졌고,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에서는 1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4학년 자녀를 둔 11년 차 워킹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참석자는 회사의 배려로 육아 관련 제도를 활용하며 직장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지만 자녀가 고학년이 되면서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였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정책은 굉장히 많지만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한다"며 방학마다 시차출퇴근과 연차, 무급휴가 등을 활용해 자녀를 돌봐 왔다고 했다. 이어 "방학마다 항상 그만둬야 하나라는 고민들이 있었다"며 육아지원 제도를 초등학교 전 학년으로 확대해 달라고 호소했다.
정부는 이번 기본계획에서 영유아부터 초등학생까지 부모의 생활시간과 다양한 근로유형에 맞는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K-돌봄' 체계 구축을 도전과제로 설정했다. 어린이집과 학교 등 기관 간 연계를 강화해 돌봄이 필요한 아동을 발굴하고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는 한편, 부처별·지역별로 분산된 돌봄서비스 정보도 통합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서비스를 이용하기까지의 대기기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을지, 초등학교 고학년의 돌봄 공백은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방안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돌봄서비스를 안내하고 연계하는 것에서 나아가 실제 이용 가능한 인력과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아이 맡기라고만 말고 직접 키울 시간 달라"…노동시간 지적
돌봄시설을 확대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이자 인구전략위원회 민간위원인 이총희씨는 회계사로 일하다 자녀 양육을 위해 경력을 조정한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그는 "부모의 돌봄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노동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돌봄서비스를 강화하면서 아이를 맡기고 일하라고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편하게 일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부모들 입장에서는 아이를 꼭 맡기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며 노동시간을 줄여 직접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출퇴근 시간도 양육환경을 저해하는 문제로 꼽았다. 경기도에서 자녀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서울로 출근하면 오전 10시가 넘고, 아이를 데리러 가려면 일찍 퇴근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직장과 주거지가 가까운 환경을 조성해 달라고 주문했다.
정부는 이번 기본계획에서 근로자가 육아휴직과 유연근무를 개인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근무 선택제'를 추진하기로 했다. 또 예술인과 특수고용근로자, 프리랜서, 1인 자영업자 등 기존 육아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사람들에게는 내년부터 월 50만원씩 3개월간 육아수당을 지급할 계획이다.
다만 유연근무 제도를 마련하더라도 직장에서 눈치를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장시간 노동과 통근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책 역시 이번 인구전략에서 충분히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93세 어머니 돌봄에 직장 못 구해"…서비스 접근성 개선도 요구
선포식 참여자들은 고령자 돌봄 부담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64세인 최해진씨는 93세 어머니를 돌보느라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장기요양보험 4등급 판정을 받은 어머니가 치매 증상으로 외부인의 방문을 꺼리고 주간보호시설 이용도 거부하면서 가족이 돌봄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최씨는 "문제는 돌봄 책임이 생기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라며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직장을 구하고 싶지만 어머니를 돌봐야 해 프리랜서나 단시간 일자리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경력과 전문성을 갖춘 고령자들이 노부모를 돌보면서도 재택근무나 단시간 근무를 통해 경제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돌봄서비스의 접근성과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대한민국 인구전략의 성공 여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외진 곳에 계신 노인에게 돌봄이 닿는가의 여부로 판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돌봄서비스의 총량을 늘리는 것에서 나아가 시장 여건에 관계없이 취약지역에도 공공 돌봄이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호스피스 등 생애말기 돌봄의 이용 제약을 완화해 달라는 요구도 덧붙였다.
정부는 치매주치의 확대와 재가돌봄서비스 확충, AI·돌봄로봇 보급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치매 공공후견인도 올해 300명에서 2030년 19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노인돌봄 분야에서는 방문재활과 통합재택간호 등 서비스를 확대하고, 인구감소지역을 중심으로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청년 돌봄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그러나 가족이 외부 돌봄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나 돌봄 때문에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 가족의 경제활동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은 이날 토론에서 돌봄 지원 확대만으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보다 근본적인 논의를 주문했다.
이 대통령은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못 먹는 문제, 출산을 결심하지 못하는 문제"를 언급하며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기본계획에서 출산율 수치 목표 대신 2030년까지 국내 조사 기준 '국민 삶의 만족도'를 현재 6.6점에서 7.0점으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웰빙연구센터 등이 발표한 '2026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한국의 삶 평가 점수는 6.04점으로 조사 대상 147개국 중 67위에 그쳤다. 7.0점 이상인 국가는 총 10곳으로 핀란드(7.764), 아이슬란드(7.540), 덴마크(7.539) 등 북유럽 국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