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싣는 순서 |
| ①"저 죽으면 애들 유령돼요"…시한부 베트남 엄마의 호소 ②학교 가려면 범칙금부터…강제퇴거 두려워 7살에야 어린이집 ③"국어시간이 제일 싫어요"…통역만으론 좁히기 힘든 학습 격차 (계속) |
지난달 17일 오전 인천 미추홀구 석암초등학교의 한 교실. 파리채를 든 아이들이 신이 난 표정으로 칠판 앞으로 달려 나가 선생님이 부른 단어가 적힌 곳을 내리쳤다. 칠판에는 '교실', '가방', '연필', '개미' 등 일상에서 자주 쓰는 기초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이어 '몸으로 말해요' 게임이 시작됐다. '축구'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이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을 차는 흉내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은 한국어 기초가 부족한 이주배경 학생들을 위해 매일 운영되는 한국어 학급이다. 2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년도, 출신 국가도 제각각이지만 한국어 보충 수업이 필요한 아이들이 한데 모여 퀴즈와 게임 등을 통해 한국어를 익힌다.
문제는 한국어 수업이 끝난 뒤다. 학생들은 원래 학급(원반)으로 돌아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정규 교육과정을 따라가야 한다. '의자' 같은 기초 어휘를 배우던 학생이 원반으로 돌아오면 수학 시간에는 어려운 '분수' 개념을 마주해야 한다.
멍하니 앉아 있는 학생들…커지는 학업 격차
같은 날 5학년 1반의 수학 시간. 이날 수업 주제는 '분수'와 '최소공배수'였다. 중국과 러시아 출신 이주배경 학생 2명의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이어폰이 놓여 있었다. 교사가 수업을 시작하자 설명이 실시간으로 중국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돼 화면과 이어폰을 통해 전달됐다.
일반 번역 앱이 교육 전문 용어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자, 이 학교 교사들이 초등 교육과정 데이터를 직접 학습시켜 개발한 'AI 교육용 동시번역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교사의 설명을 실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교사들이 고안한 대책이다.
그러나 인공지능(AI) 통역만으로는 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 일상 회화 수준의 한국어와 교과서 속 학습 언어 사이의 간극이다. 교사의 설명을 실시간으로 번역해 듣는 것과 '진분수'나 '통분' 같은 수학 개념을 이해하고 풀이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 이날 수업에서 한 중국 학생은 교사가 곁에서 풀이를 도와줄 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혼자 문제를 풀 때는 이내 펜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수업을 진행한 조미진 교사는 "아이들이 한국어로도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려다 보니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AI 지원을 하기 전에는 언어 장벽에 학습 결손까지 겹쳐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한 문제라도 더 풀어보게 하려고 선생님들이 직접 번역 앱까지 개발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교생 26%가 이주학생… "국어 수업, 어렵고 싫어요"
석암초는 전체 학생 876명 가운데 이주배경 학생이 232명으로, 전체의 26.5%를 차지한다. 전교생 4명 중 1명꼴이다. 학년이 낮을수록 비율은 더 높아져 1학년은 35.4%가 이주배경 학생이다. 입학생 중 이주배경 학생이 차지하는 비중도 해마다 커지고 있다. 출신 국가는 중국, 베트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튀르키예, 미얀마 등 14개국에 이른다.특히 국내에서 태어나 자란 학생보다 부모를 따라 학령기에 한국으로 온 '중도입국' 학생의 비중이 커지면서 학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이들은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국어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한국 학교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만난 중도입국 학생들은 여느 초등학생처럼 활발했지만, 언어 장벽 앞에서 매일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학교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묻자 학생들은 하나같이 국어 수업을 꼽았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온 지 1년 된 2학년 오민호(9)군은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출신인 2학년 아델리나(9)양도 "국어 시간이 어렵다"며 "선생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실 때는 머리가 아플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중국 출신인 박미진(10)양과 김준범(10)군도 국어 시간을 가장 힘든 시간으로 꼽았다. 박양은 "국어 수업이 싫다"고 했고, 김군은 "국어 받아쓰기 시험이 가장 싫다"며 "시험을 볼 때마다 많이 틀린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온 지 2년이 넘은 4학년 김수림(11)양도 "한국어를 잘 몰라 받아쓰기나 긴 이야기가 나오는 국어 수업이 너무 어렵다"며 "친구들과 노는 게 제일 즐겁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는 조금씩 익숙해져도, 긴 글을 읽고 뜻을 파악하거나 문장으로 답해야 하는 수업과 평가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다고 해서 같은 수준으로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과 학습의 부담도 커진다.
교사 '개인기'에 의존하는 현장… 체계적인 국가 지원 시급
석암초는 AI 동시번역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 외에 14개국 언어로 번역된 가정통신문을 확인할 수 있는 QR 시스템도 운영하고 있다. 별도의 한국어 학급도 운영하는 등 이주배경 학생을 위한 교육 기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원 체계를 갖추지 못한 학교에서는 한국어가 서툰 학생들이 정규 수업에서 사실상 소외되기도 한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교사 A씨는 "반에 한국어를 거의 못 하는 중도입국 학생이 한 명 있는데, 수업 시간 내내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며 "다른 학생들의 진도를 나가야 하다 보니 그 아이에게만 매달릴 수도 없어 사실상 방치하게 된다. 매 수업이 교사에게도 아이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라고 말했다.
경기도의 또 다른 초등학교 교사 B씨도 "다문화 학생 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한국어 강사나 통역 인력을 지원받을 수 있다"며 "대다수 학교는 교사 혼자 온몸으로 때워야 하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학생의 한국어 수준에 맞춰 수업을 조정하고 별도의 학습 자료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가정과 소통하는 일까지 교사 개인의 역량과 헌신에 의존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개별 학교와 교사의 노력만으로는 커지는 학습 공백을 메우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암초에서 한국어 학급을 담당하는 이창성 교사는 교재와 인력 부족을 문제로 꼽았다. 이 교사는 "성인용 한국어 교재는 많지만, 초등학생의 눈높이와 교육과정에 맞춘 체계적인 연계 교재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초기 기초 어휘를 배울 때 사용하는 '표준 한국어' 교재 단계를 지나면 교사들이 교재를 직접 개발하거나 찾아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어 교육이 필요한 학생을 수용할 여력도 부족하다. 이 교사는 "주변 학교에서 '한국어 학급이 없는데 한국어를 전혀 못 하는 학생이 있다. 전학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빗발친다"며 "특정 학교가 지역 내 이주학생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어 고민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근본적으로는 인력 지원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AI 번역 프로그램을 개발한 조미진 교사도 학교 자체적인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 교사는 "외부 번역 API를 끌어다 쓰는 비용조차 학교 자체 예산으로 충당했다"면서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이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려움은 학습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정에서 주로 모국어를 사용해 한국어를 연습할 기회가 부족한 학생도 있다. 이창성 교사는 "집에서도 한국어를 사용해줘야 하는데, 부모님이 모두 중국인이나 베트남인인 경우가 많다"며 "아무리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쳐도 집에서는 모국어를 사용하다 보니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교 안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교사는 "특히 우리 학교는 중국 학생 비율이 높은데, 쉬는 시간에도 중국 학생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중국어가 많이 들린다"며 "최대한 한국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수업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교실 안에서 이방인처럼 겉도는 아이들. 이주배경 학생이 늘어나는 현실에 맞춰 한국어 교육과 교과 학습, 정서·생활 지원을 아우르는 공교육 차원의 교육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