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0~30만명이 찾는 아시아 최대의 의류산업단지, 3만여 점포가 밀집해 화려한 조명을 뿜어내는 곳, 광장시장, 평화, 청평화, 동평화시장 등 전통도매상권과 Apm, 디오트 등 신흥도매상권 그리고 두타와 밀리오레 등의 신흥소매상권 전체를 아우르는 패션타운, 바로 동대문시장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아시아 최대 의류시장의 기본 엔진은 조명이 현란한 이곳 건물들 속에 있지 않다. 동대문시장을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뒤에서 떠받치고 있는, 동대문 뒤 낙산 산동네 ''''창신동''''이 지금 동대문시장을 움직이는 심장이며 배후지다.
동대문시장 뒤에 펼쳐진 창신동 전경 사진
60년대부터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던 창신동. 서울에 밀려든 누이들이 맨 손으로 터를 잡은 곳, 쪽방에서 선잠을 자고 배를 주려가며 살인적인 중노동으로 돈을 모아 가족에게 돈을 부쳐주던 곳이, 서울의 대표적인 서민동네 창신동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창신동 쪽방'' 전시 사진
과거 평화시장의 좁은 봉제공장에서 웅크리며 일하던 시다 출신의 누이들은 이제 가내수공업 방식 혹은 가게 점포 방식의 어엿한 창신동 봉제공장 안주인이 돼서 동대문시장을 떠받치고 있다. 동대문시장으로부터 주문이 들어오면 하루 만에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옷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들이 가진 수십년간 숙련된 기술 때문이다. 여기에 동대문시장과의 인접성과 기동력, 운집성이 더해지면서, 창신동 봉제골목은 동대문시장의 배후기지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창신동 쪽방''
창신동 봉제골목의 안주인이 된 오늘날 동대문시장의 ''''어머니''''들은 과거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자신을 희생했던 ''''산업화 초기 수출산업 역군''''이자, 자신들이 번 돈으로 시골의 가족을 부양하던 ''''앙상한 농촌 가정의 기둥''''이었고, 지금 대한민국 경제 엘리트가 된 남동생과 오빠들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학 보냈던 ''''대한민국 경제의 인큐베이터''''였다.
이들이 모여 있는 창신동 봉제골목을 두고, 단순히 동대문시장의 배후지를 넘어 대한민국 산업화의 산소공급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저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옷을 하나쯤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동대문시장에 가려서 눈길을 주지 못했던 곳, 동대문시장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는 우리 의류산업의 속살, 화려한 동대문시장과 웅장한 동대문 너머의 산동네 ''''창신동 봉제골목''''으로 지금부터 함께 걸어보자.
봉제공장
창신1동에 있는 문구, 신발, 도장골목과 쪽방촌을 지나면 창신2동의 봉제골목이 시작된다. 정신없이 오가는 오토바이 사이사이를 걷다보면 어느새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산 위에 다다른다.
창신동 봉제골목
창신동 봉제골목에는 3천여개의 봉제공장들이 들어차있다. 도시형 한옥, 개조된 판잣집, 다세대주택까지 다양한 집들 사이로 봉제공장들이 빼곡하다. 이 골목을 걸으면 그동안 잊고 있던 봉제기계 소리들이 따라온다.
창신동길 낮은 지대 주변으로는 각종 부자재 점포와 패턴 작업장 그리고 패턴부터 미싱까지 도맡아 하는 종합공장들이 모여있다. 동부여성문화센터 왼쪽으로는 한가지 공정만을 담당하는 소규모 작업장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아래 지대 종합공장의 일손을 돕는 낱일 형태의 작업장이 이어져 있다. 창신동길을 따라 높은 지대 성곽까지 한번 왔다갔다하면, 옷 한 벌이 하루 만에 만들어지는 마법 같은 곳이다.
봉제공장345
창신동 봉제골목은 동대문 평화시장 일대 봉제공장들이 창신동 안으로 진입하며 생겨난 골목이다. 19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들이 더 이상 기존의 극단적 저임금 장시간 노동 체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대기업들도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면서, 어려움에 처한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의 봉제공장은 땅값이 싼 창신동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한때 2만 7천여명에 달하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자들이 창신동을 비롯한 인근 주택가의 작은 봉제공장 하청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은 동대문시장 의류를 주문 생산하는 하청 봉제공장의 안주인이 된 것이다.
봉제공장
197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 시절에는 사장과 직원이 섞이기 힘든 관계였으나, 지금과 같은 작은 규모의 창신동 봉제공장에서는 공장주와 미싱사, 미싱 시다가 모두 가족 같이 지낸다. 봉제인들의 수가 줄다 보니, 한명 한명이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봉제골목 안에는 28년 동안 골목길을 지켜온 ''''시온 이발소''''가 있다. 이발소의 작은 양철지붕 밑에는 늘 빨간 수건이 걸려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이발소는 이발에 들이는 정성으로도 유명한데, 한 손님을 이발하는 데에 약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시온이발소
봉제골목 안에는, 재단사와 봉제사들이 사랑방으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홍표 실집''''이 나타난다. 실, 심지, 초크, 지퍼 등 재단과 봉제에 쓰이는 다양한 부자재들을 파는 곳이다. 실집 앞에서는 봉제사들이 이따금씩 삼삼오오 모여서 직접 깎아 만든 장기판으로 장기를 즐긴다.
홍표 실집
홍표 실집에서 골목 위로 올라가면, 낙산의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창신동의 특징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길이 나오는데, 마을주민들이 ''''회오리 고개''''라고 부르는 경사길이다. 창신동 당고개 공원 밑으로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정겨우면서도 흥미롭다. 꼬불꼬불 꺾이는 동네 고갯길을 걷다보면, 아련한 시간 여행을 떠나온 느낌이다.
회오리길
봉제골목과 함께 창신동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바로 ''''채석장 절개지''''다. 90도로 꺾이는 진기한 절벽을 주민들은 돌산 밑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부 직영 채석장이었다. 1925년 경성역(서울역), 1926년 경성부청(서울시청), 1926년 조선총독부가 이곳 낙산 채석장의 돌로 만들어졌다. 해방 후에도 얼마간 채석장으로 쓰이다가 60년대 이후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절개지 위에 올라앉은 가옥들의 모습이 조금은 위태해 보이기도 하는 독특한 풍경이다.
채석장 절개지
창신동 봉제골목 밑에 자리 잡은 전통시장이 ''''창신시장''''이다. 무허가 판자촌들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장이다. 창신시장은 중독성이 강한 ''''매운 족발''''로 유명한데, 최근에는 창신동 봉제공장에 외국인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중국식 양꼬치, 인도와 네팔 요리 등 다양한 각국의 음식점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특히 이곳의 네팔 식당은 네팔인들의 커뮤니티 장소로서 우리나라에 오는 네팔인들이 한번씩은 꼭 들리는 곳이자, 네팔인들의 결혼식이 열리는 곳이다.
그리고 창신동에는 창신동 주민이 직접 만들고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국 ''''덤''''이 있다. 동네의 봉제인들을 위한 이야기와 노래, 동네 예술 활동 소개, 그리고 노동자 여성들의 수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네 라디오 방송국이다. 제작하는 장소를 개방하지는 않지만, ''''창신동 라디오 덤''''을 팟캐스트로 검색해서 청취할 수 있다. 창신동에 사는 주민들의 실제 사는 이야기와 동네의 속살을 체험하는 좋은 길잡이다.
서울을 대표하는 서민 동네 창신동은,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낙산과 창신동이 자주 배경으로 등장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들이 옛 정취가 풍기는 창신동 골목을 거닐었고,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여주인공 길라임의 옥탑방도 창신동 당고개 언덕 위 주차장 옆 건물이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길라임 집
창신동에는 지금도 쪽방촌이 자리하고 있다. 한평 남짓한 공간에 대부분 무보증 월세로 살아가고 있는데, 최근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의 골목골목을 벽화로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쪽방촌 전시 사진
지나쳐왔지만, 창신1동의 창신동의 문구 골목과 도장 골목도 들려보자. 창신1동 동묘역 뒤편으로는 100여개의 문구와 완구점들이 유명한 문구 골목을 형성하고 저렴한 인기 완구 품목들을 진열해놓고 있다. 또 문구 골목 옆에는 도장 가게들이 즐비한데, 100여개가 넘던 점포가 지금은 도장 수요가 줄어 30여개로 줄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도장을 파기 위해 찾는 골목이다. 창신동의 특징이 담긴 정감 어린 산책길이다.
골목 벽화
지금까지, 추억과 역사가 녹아있는 동대문시장의 배후지이자 어머니격인 서울의 대표 서민동네 ''''창신동 봉제골목''''을 함께 잠시 걸어봤다. 창신동을 제대로 느끼려면 혼자 무작정 걷기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창신동 마을 전시와 해설 산책을 활용하기를 추천한다.
지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이라는 지역전시 연계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창신동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철거될 당시 쪽방촌과 봉제골목의 모습 일부를 집 재료까지 그대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봉제공장과 생활공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5월 30일부터 7월 21일까지.
봉제공장 짜투리 원단을 활용한 서울역사박물관 창신동 전시 타이틀
그리고 박물관 전시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 창신동 마을 투어를 연계해서 진행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도시의 산책자="">라는 창신동 마을투어를 예술가집단 ''''러닝투런'''' 그리고 마을 해설사들과 함께 7월 20일까지 매주 토요일 낮 2시부터 4시까지 진행하고 있으며, 070-7626-5782로 접수를 받고 있다.
해설사의 안내가 없는 ''''삼삼오오 자율산책''''도 진행 중이다. 음성안내기를 제공받은 후 창신동 봉제골목 각각의 지점에서 해당 음성 안내를 직접 듣는 프로그램으로, 해당 지점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7월 20일까지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 중에 자유롭게 신청해서 활용할 수 있다.
창신동을 걸으면서 이 한가지를 꼭 기억하자.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그러나 그 화려함을 떠받치는 배후지 ''''창신동''''의 특징은 단지 창신동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창신동이 자리한 낙산 주변이 바로 대한민국 서울의 산소공급지이자 인큐베이터와 같은 곳이다. 동대문 낙산 지역은 남촌의 명동처럼 화려하지도, 서촌의 옥인동처럼 고즈넉하지도, 북촌의 가회동처럼 멋스럽지도 않다. 낙산은 인왕처럼 장쾌하게 뻗어있거나, 백악처럼 멋있게 솟았거나, 남산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산도 아니다.
그러나 이 땅의 화려한 영화 산업과 공연 예술은 대학로의 젊고 가난한 배우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토해내는 1차 예술로서의 연극을 그 토대로 삼고 있으며, 화려한 패션 산업의 배후에는 낙산 언덕에 조용히 자리잡은 채 동대문 의류 산업의 동맥이자 실핏줄 역할을 하고 있는 3천여 점포의 창신동 봉제 골목이 떠받치고 있다. 이제는 제도화된 이 땅의 민주주의의 뿌리에는 인간의 기본권을 외치며 산화한 동대문 평화시장의 한 젊은이 ''''전태일''''이 있다. 이 땅의 문화 산업과 패션 산업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몸을 만든 후 뻗어갔다.
눈에 띄지 않는 낮은 곳에서 위를 떠받치며, 배후지로서 인큐베이터로서, 어머니 같은 모태로서, 서울에 산소를 공급하는 곳, 그곳이 창신동이 자리잡은 동대문 낙산 지역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창신동 산책의 끝에 낙산 공원에 올라 낙산을 품고 흐르는 멋진 도성의 야경을 즐기면서 낙산의 전체적인 장소성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면, 더 없이 뜻깊고 멋진 산책이 될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당신과 참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아마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 최소한 하나는 내 안의 봉제공장에서 만들어졌을 거에요.그.러.나.. 당.신.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죠..
나.는.. 오.랜.. 세.월.. 당.신.과.. 함.께.. 했.습.니.다.서울의 도성 밖 그리 넉넉지 않은 서민들의 삶터로서 나는 늘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었죠.그러나 당신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죠.
당신은 나에 대하여 잘 모를 테지만, 나는 늘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그렇게 오랜 세월 나는 당신의 삶 옆에 있었으며,당신과 함께 했습니다.
나.는.. 창.신.동.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반세기종합전="" 5.="" ''''made="" in="" 창신동''''="" 전시="" 동화책="" 中="">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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