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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 어때] '설국열차' "더도 덜도 말고 사람답게만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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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희생 위 1% 특권' 고삐 풀린 자본주의 비판 우화…몰입도 높은 이야기 구조 돋보여

 

미국의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서도 봤듯이, 1%의 부자·권력자가 99%의 다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고삐 풀린 체제의 실태를 고발한 영화들도 더불어 주목받고 있다.
 
최근 개봉한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를 봤을 때의 일이다.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꼬집은 우화로 읽히는 이 영화가 끝난 뒤 한 큐레이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주인공 에릭 파커(로버트 패틴슨)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파커를 자본주의 자체로 보지 않고 병든 체제를 개선하려고 애쓰는 자본가의 한 사람으로 이해했다. 이유를 묻자 "파커를 자본주의로 봤을 때 그가 무너지고 난 뒤 오게 될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를 대신할 체제가 없는 만큼 그 안에서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렇듯 코스모폴리스는 난해한 대사와 설정 때문인지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설국열차'도 코스모폴리스와 엇비슷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예술 영화 냄새가 짙은 코스모폴리스에 비해 이야기 흐름이 쉽고 재밌는데다 결말도 보다 명확하다.
 
때는 서기 2031년, 인류가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쏘아올린 'CW-7'이라는 장치 탓에 지구는 새로운 빙하기를 맞게 되고, 생존자들은 기차 안에서 계급별로 나뉘어 17년째 살아가고 있다.

다수의 꼬리칸 사람들은 매일 밤 군대에서처럼 줄별로 앉으면서 번호를 외치고,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단백질 블록을 끼니로 배급 받아 연명하고 있다.


  
어느 날 불합리한 대우에 저항해 들고 일어났다가 진압된 꼬리칸 사람들을 모아두고 열차 세계의 총리인 메이슨(틸다 스윈튼)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질서 덕에 이 자리에서 얼어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거야. 모든 것은 성스러운 엔진 덕분에 존재한다!"
 
열차칸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철저히 감시받으며 사는 자신들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바꾸고 싶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되뇐다. "우린 앞칸으로 가도 절대 그런 짓 안해."
 
커티스를 중심으로 그를 부모처럼 따르는 에드가(제이미 벨), 꼬리칸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길리엄(존 허트), 앞칸 사람들에게 자식을 빼앗긴 타냐(옥타비아 스펜서)와 앤드류(이완 브렘너) 등은 각자의 간절한 이유를 갖고 한 칸 한 칸 앞쪽으로 돌진한다.

여기에 열차 문을 열 수 있는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와 열차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딸 요나(고아성)가 합류하면서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도 본격화한다.
 
꼬리칸 사람들이 앞칸으로 돌진해 얻으려는 목표물은 분명하다. 바로 열차의 제일 앞칸에 있는 엔진이다. 반란군이 앞칸으로 전진하는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궁금증이 있다. '반란군이 엔진을 얻은 뒤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영화 설국열차는 이렇듯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꼬리칸 사람들의 팔이나 다리가 하나씩 없는 까닭은 뭘까?' '커티스가 엔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남궁민수가 숨기고 있는 속내는 무엇일까?' 등등.
 
그만큼 설국열차의 이야기 구조는 흥미롭다. 열차 안 모든 사람들이 유기체처럼 엮이고 엮인 관계 속에서 주요 인물들은 각자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되는데, 그들의 결정은 극 말미에 이르러 각각의 타당성을 드러내며 관객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무엇보다 충실하려 애쓴 점도 눈길을 끈다. 오프닝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파격적인 장면 대신, 옅은 눈발을 배경으로 지구 온난화를 개선할 CW-7의 효과를 설명하는 뉴스 해설이 이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대한 사상가로 불리는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인류 역사가 다섯 단계에 걸쳐 발전한다고 봤다.

식량 등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던 원시 공산제 사회는 국가·사유재산 개념이 생겨나고 그 정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면서 고대 노예제 사회로 이행했다.

이어 중앙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 영주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노예제는 봉건제로 바뀌고 인류(엄밀히 말하면 서양)는 중세를 맞았다.
 
근대 들어 산업혁명을 통해 인류는 전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잉여생산물을 갖게 됐고, 이를 독점하는 소주의 부르주아(자본가)와 끊임없이 노동력을 착취 당하는 다수의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뉜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면서 세상은 빈부격차 등의 커다란 내부 모순을 쌓아간다.
 

 

설국열차 속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열차의 엔진을 장악하고 있는 절대자 윌포드(에드 해리스)가 머무는 맨 앞칸의 문에는 '윌포드 산업(Wilford Industry)'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가 기업가 출신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영화 속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실칸에서 학생들이 열광하던 윌포드에 관한 영상도 기업가의 성공신화를 선전하는, 지금 세상의 홍보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인을 일삼는 체제의 수호자가 등장하고, 앞칸으로 갈수록 잉여생산물을 차지한 덕에 일을 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담긴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설국열차 속 사람들은 한정된 열차 바깥으로 인식의 폭을 넓히지 못한다. 열차가 운행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얼음벽 등 외부 위험 요인이 생길 때는 반란까지 잠시 멈춰야할 만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열차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특별한 대안이 없는 까닭에 열차라는 차악이 진리로 탈바꿈한 셈이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절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통해 이룩할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였다. 1990년대 후반 소련이 해체되면서 마르크스도 종말을 고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자본주의는 더욱 철저하게 인간을 도구로 삼아 덩치를 키우는 모양새다. 최근 몇 년 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마르크스의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전 세계가 마르크스에 주목하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그의 사상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장 밑바탕에 두고 당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차곡차곡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설국열차가 바라는 세상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강렬한 메시지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설국열차는 그 자체로 재밌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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