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광해군에 의해 새롭게 지어졌지만, 이 문을 지키던 훈련도감 대장의 배반으로 결국 왕위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 최고의 군대, 궐문을 열어 젖히다1623년 3월 12일 밤. 창덕궁을 향해 반정군이 들이 닥치고 있었다. 왜란을 겪으면서 새로운 군사와 무기체계가 절실히 필요했던 조선은 총포와 같은 무기를 도입해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반란군이 규모가 크다고는 하지만, 훈련도감의 잘 훈련된 군사들과 무기 앞에서는 사실 견줘볼 상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훈련도감 대장 이홍립은 반정군이 돈화문 앞까지 왔다는 급한 전갈을 받고도 부대에 아무런 명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창덕궁의 정문을 열어 젖히라는 엉뚱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서인과 내통한 이홍립은 반정군에 투항하고 말았고, 아무런 저항없이 궁궐에 들어온 반정군들은 순식간에 궐을 점령했다.
젊은 내시의 안내를 받은 광해군은 후원의 담을 넘어 창덕궁 근처 내의원 안국신의 집에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안국신 아내의 밀고로 결국 반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명민하고 군왕의 자질을 갖췄지만, 아버지 선조에게서 질투와 미움을 받아 어렵사리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은 결국 당쟁의 희생양이 되면서 왕위를 뺏기고 말았다.
▲왕의 이상한 밀지 ‘전쟁에 나가거든 반드시 져라!’임금은 파병대장 강홍립을 은밀히 불러들었다. 그리고 강홍립에게 은밀한 밀지를 내렸다. ‘전쟁에서 절대로 이기지 말고, 때를 보아 투항하라!’ 전쟁에서 패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밀지를 받아든 강홍립은 결국 변변한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후금에 항복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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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이미 기운 나라였고, 오랑캐라 불리우던 후금은 세력을 키우며 중원을 장악할 태세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왜란때 도움을 줬던 명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명의 파병요청을 거절해서는 안되다고 아우성이었다.
중국의 정세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은 임금뿐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어디 군왕의 나라이던가. 광해는 절묘한 전략을 짜낸 것이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서신교환을 통해 후금의 동정을 알려줬다.
후금의 누루하치는 조선의 정세를 이해한다며 조선과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절묘한 ‘등거리 외교’였던 셈이다.
광해군을 내쫒고 왕위에 오른 능양군 인조는 명분을 내세우며 명을 도우면서, 위태롭게 유지되던 후금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결국 전 국민의 1/3이 숨지는 끔찍한 전란이었던 임진왜란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에, 조선 백성들은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또 겪어야 했고, 오랑캐라 부르던 후금의 왕에게 인조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찧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돈화문의 야경. 1607년 광해군이 중건한 이후 유일하게 원형을 보전하고 있는 조선 궁궐의 정문이다. 4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조선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며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자료제공=문화재청)
▲광해군이 정궁으로 만든 궁궐 ‘창덕궁’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문은 지어졌을 당시 원형이 그대로 보전되고 있는 유일한 궁궐의 정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광해군 시절인 1607년 지어졌다.
창덕궁은 법궁이던 경복궁의 이궁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은 완전히 전소됐고, 법궁인 창덕궁 역시 불에 탓지만, 광해군은 창덕궁을 먼저 중건했다.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 선조와 조정을 나눠 분조를 담당했던 광해군은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등 전란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덕에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은 터가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던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기로 하고, 새로운 궁인 경덕궁(지금의 경희궁)과 인경궁을 지어, 법궁과 이궁체제를 완성했다.
창덕궁은 이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약 270여넌동안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해왔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법궁으로 세운 첫 임금이자, 창덕궁에서 쫒겨난 첫 임금이 됐다.
▲왜 궁궐의 문에는 모두 ‘화(化)’자가 들어있을까?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이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興化門),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大漢門)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덕수궁을 제외한 다른 궁의 정문에는 모두 화(化)자가 들어있다. 실은 덕수궁의 정문이름도 인화문(仁化門)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대한제국의 궁궐이 되면서 동쪽 문인 대안문(大安門)으로 바뀌었고, 나중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졌다.
결국 5개 궁궐의 정문 이름에는 모두 화(化)자가 들어간 셈이다. 모든 궁궐의 이름에 ‘화’자가 들어간것은 궁궐의 대문이 백성들과 임금이 만나는 ‘소통’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지만, 당시 교화의 의미는 백성을 깨우친다는 의미보다는 백성의 민의를 듣고 소통하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경복궁의 광화문은 임금의 교화가 빛처럼 온나라를 밝게 비춘다는 뜻이고, 창덕궁의 돈화문은 임금이 백성에 대한 교화를 돈독히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최근 ‘소통’이라는 단어가 자주 오르내린다. ‘광화문’의 뒤켠에는 청와대가 있다. 예전에 굳게 닫혀 있던 광화문은 이제 활짝 열려 통행이 자유롭다. 조선의 임금들이 대궐정문에 ‘화’를 넣은 의미를 되새겨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