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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어디까지 실화? "노무현이다 노무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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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실화인가?

변호인 포스터

 

영화 '변호인'(감독 양우석)이 개봉 첫날 1000만 영화 ‘7번방의 선물’이나 ‘광해, 왕이 된 남자’보다 더 많은 23만 관객을 모으며 폭발적인 흥행을 예고했다.

18일 전야 개봉한 변호인은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서 19일 하루 동안 23만 명을 동원해 누적관객 37만2256명을 기록했다. 이는 올해 1280만 관객을 모은 '7번방의 선물'의 21만2148명, 지난해 1231만 관객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의 16만9516명을 뛰어넘는 수치로, 역대 12월 개봉작 중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다.

변호인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정치적 입장이 다른 네티즌들 사이에서 첨예한 신경전이 벌어져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덕분에 영화의 소재인 부림사건과 어디까지가 노무현 대통령의 실제 이야기인지 여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노무현이다, 노무현이 아니다

부림사건이란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공안당국이 부산 지역 독서모임의 학생, 교사 등 22명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용공조작사건이다. 변호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변론을 맡았던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

노무현을 모델로 송강호가 연기한 변호사 송우석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송우석=노무현'은 아니다.

양우석 감독은 앞서 "고 노무현 대통령은 모티브로 남고, 영화는 영화로 풀려고 노력했다"며 "사실을 왜곡하거나 미화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영화를 봐도 일부 네티즌의 주장처럼 노무현 미화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는 주인공을 신화적 인물로 그리지 않은 점이다. 직업은 번듯한 변호사지만 시쳇말로 빽도 줄도 없는 송우석은 우리네와 다를 바 없는 소시민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변호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맞섰던 1980년대의 치열함을 담아내는데 집중한다. 주인공의 이름을 송강호의 성과 감독의 이름을 합쳐 송우석이라고 지은 이유도 영화에서처럼 비상식적인 일이 자행되면 우리 모두가 극중 인물처럼 용기를 갖고 맞서 싸우길 바란다는 열망을 담았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이렇다보니 변호인은 가난의 설움을 알고 부를 쫒던 한 소시민이 부조리한 사회의 민낯을 접하고는, 법과 윤리라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려 애쓰는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린 작품으로 다가온다.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마저도 보편적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더불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가진 관객도 끌어들이고 있으며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관객마저도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인하고 욕하기 위해" 보게 만들고 있다.

변호인 보도스틸

 

시쳇말로 ‘노빠’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사실상 노무현 영화는 아닌 거 같다”고 했다.

“노무현을 모티브로 따왔지만 정작 감독과 배우들도 노무현이라는 단어를 끝까지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1980년대 인권 변호사들이 주축이 된 영화다. 한두 명이 아닐 거 아닌가. 그 변호인들의 이야기를 여러 명의 사람을 하나의 영화로 만든 거뿐, 그 중에 한명이 노무현이다. 그러니 노무현이기도 뭐하고, 노무현이 아니기도 뭐하다."

부림 사건 맡을 당시 “달가워하지 않았다”

송우석이 노무현 대통령처럼 상고 출신이고, 판사생활을 1년 만에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것은 사실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이후 노무현 대통령을 정치계로 입문시킨 김광일 변호사가 2006년 월간지 신동아 10월호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노무현은 선배인 김 변호사에게 개업에 필요한 돈을 빌렸다.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김광일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3개월간 시보교육을 받았다. 김 변호사는 그의 지도변호사였다. 대구서 판사생활을 관두고 부산에 내려왔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김 변호사를 찾아 돈을 빌렸고, 두 달 맡에 갚았다.

“개업을 했으나 사건이 별로 없어 주로 사법서사가 하는 은행의 등기·저당 관련 사건을 맡았다."

부림사건의 변호를 제안한 것도 김광일 변호사였다. 김 변호사는 당시 부림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돼 학생들을 변호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는 변호사들에게 부림사건 관련 학생들 변호를 요청했고, 노무현 변호사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문재인 변호사도 같이 맡았는데,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일한 반면 노 변호사는 처음에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변호인 보도스틸

 

노무현 “실제로 법정에서 뜨거웠다”

다섯 차례의 법정신에서도 사실과 다른 영화적 요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양심선언에 나선 군의관이다. 극중 송강호는 군의관을 증인으로 내세워 결정적 증언을 받아내나 검사 측에서 탈영병으로 몰면서 재판에서 패한다. 이에 검사와 변호사가 내고해 피해자들이 대략 2년형을 받는 것으로 정리된다.

실제로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된 뒤 짧게는 20일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돼 구타는 물론 물고문과 통닭구이 고문을 받았다.

모두 22명이 구속됐으며, 검사측은 국가보안법·계엄법·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해 징역 3~10년을 구형했고 재판정은 5~7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옥고를 치르던 이들은 2년 뒤인 1983년 12월 전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노무현 재단이 공개한 당시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고호석 씨는 "1심 이후 2심 항소심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2심에서 최후결심을 할지 몰랐다. 1심의 법정구속기간이 6개월인데 재판이 길어지면 우리를 풀어줘야 해서 무리하게 (최후결심을) 한 측면이 있다. 최후변론과 최후진술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날 당일 준비했다. 결국 재판이 하루 넘기고 다음날 새벽 2시경에 끝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법정에서 “어떻게 그게 말이 되냐”며 격앙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단다.

“형량 줄이는데 관심 없고, 피고인보다 더 과격하게 얘기했다. 가족들은 그런 노무현 대통령의 태도에 판사가 형량을 더 때릴까봐 가슴을 졸였고 실제로 우리 아버지가 변호인이 저래도 되냐고 했다.(웃음)"

고호석 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재판을 하면서 자신의 직업에 자괴감을 느낀 듯 했다고 회고했다.

"법체계가 공권력에 의해 유린당하고, 형사소송법, 형법 등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무척 실망하고 답답해했다. 변호사란 직업에 자괴감도 들었던 것 같다. 감정적으로 격앙돼 큰소리를 치거나 열변을 토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도 있었다."

실제로 변호사 시절 노무현은 법정에서 매우 투쟁적이었고, 감정적 변론을 펼쳐 판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는 후문인다.

변호인에서도 같이 변호를 맡았던 동료 변호사가 송우석의 불도저식 변론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그가 결국은 송변의 진심을 이해하듯, 관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송강호은 앞서 이 영화가 단순히 노무현 영화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분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평가받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남을지 모르겠으나, 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왔던 그분의 태도나 열정은 아직도 우리에게 의미 있게 남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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