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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 작가 사망 100일…배고픈 예술노동자는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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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뺏기고 월급 체납도 많아…제도적 보호막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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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맴돌며 갉아 먹히다 끝나는 사람들이 시나리오 작가들이예요."

영화학과 졸업 후 6년째 시나리오를 준비 중인 김성진(35.가명)씨는 "시나리오 작가로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작가'라는 타이틀만 가지고는 생활비를 벌 수 없기 때문이다.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계속 썼다는 김 씨의 친구는 월세가 3개월 밀린 상태다. 가스가 끊긴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김 씨는 "작가는 기본적으로 생활이 안된다"고 말했다.

작가에 대한 처우도 열악하다.

김 씨의 후배 중 한 명은 영화사와 2천만 원에 시나리오를 계약했지만 돈은 일시불이 아닌 한 달에 백 만원씩 월급 형태로 받았다.

매일 회사에 출근해 시나리오를 고쳤지만 결국 영화 촬영은 무산됐고, 그는 고작 몇 백만 원을 받았을 뿐이다.

"시나리오 쓰는 사람은 최약자죠. 누군가 나를 선택해야 하니까. 나 말고도 시나리오 갖다 바치겠다는 사람이 많으니 밑바닥에 있다가 계속 갉아먹히다 끝나고 말아요."

'최고은 작가 사망 100일'...변한건 없어

32살의 시나리오 작가 겸 연출자인 최고은 씨가 세상을 뜬 지 오늘로 100일이 지났다.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월셋집에서 주인집에 '쌀과 김치를 좀 더 얻을 수 없겠느냐'는 쪽지를 남기고 숨을 거두자 세상은 그녀에게 '아사(餓死)한 예술인'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남겼다.

정작 그녀를 힘들게 했던 열악한 '작업 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를 집어삼킨 건 생활고도, 병마도 아닌 예술인에 대한 '열악한 처우'였을 지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최 씨 한 사람의 죽음만은 아니라는게 예술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예술인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 같은 죽음은 언제고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진 씨는 최고은 작가 사망에 대해 "좌절감이 계속 쌓였을 것"이라며 "두 군데 정도 계약이 돼있던 최 씨가 지급받기로 한 돈을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좌절감이 쌓여 우울증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최 씨 사망 이후 정치권에서는 '열악한 예술인들의 처우를 개선하자'며 '예술인 복지 지원법안'인 일명 '최고은 법'을 발의했다.

예술인의 복지활동 지원을 위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설립하고 예술인들에게 실업 급여와 퇴직 급여 등 소득 보장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여야는 이 법을 3월 2일까지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법안은 아직까지 상임위에 계류 중이고, 사회는 점점 그녀를 잊어갔다.

"저작권 통째로 가져가고 지원금 빚독촉하기도"

영화계 뿐 아니라 출판계와 미술 분야 또한 예술인들이 불합리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TV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인형, 뮤지컬로 만들어지며 대히트를 친 동화책 '구름빵'의 경우, 원작자 백희나(40)씨가 동화책을 만들며 출판사로 받은 돈은 850만 원이 전부였다.

저작권을 출판사에 모두 넘기는 '매절 계약'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낱 신인이 출판사를 상대로 저작권을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백 씨뿐 아니라 많은 수의 신인 작가들이 출판사 측의 일방적인 계약 조건에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데뷔 2년차 신인 일러스트레이터인 김지수(26.여.가명)씨도 "출판사에 가면 아예 계약서가 만들어져 있고 우리는 거기에 서명만 하는 정도"라며 "계약 조건을 수정해달라고 하면 출판사에서 황당하다는 듯 쳐다본다. 수정 할 수 있는 경우는 0%"라고 한숨을 쉬었다.

정부는 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예술인들이 마음껏 쓸 수 없는 형편이다.

지난 2008년 경기문화재단으로부터 출판금 500만 원을 지원받은 시인 조동범(41)씨는 지난해부터 '빚독촉'에 시달렸다.

출판사의 사정으로 시집 출간이 늦어졌지만 재단 측은 "지원금을 다시 내놓던가 책을 출간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원금반환소송을 걸겠다" 고 으름장을 놨다.

재단 측에 사유서와 출간 지연 내용 증명서를 보내고서야 소송까지 가는 일을 막을 수 있었지만 "출판은 당신 사정이니 무조건 책을 만들어 와라"는 재단 측의 자세에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문인들에게 지원되는 지원금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 출판 지원금 1천만 원을 체크카드로 지급하고 도서 구입비나 집필실 임대료 등 창작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에만 지원을 하고 있다.

시인 조동범 씨는 "행정 편의주의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예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게 정부의 역할 아니냐"며 "어떻게 쓰든 제한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술인들은 "불합리한 관행이나 제도 때문에 신인 작가들이 이익 창출은 둘째 치고 작가의 권리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수(51)씨는 "당장 일 없는 신인들이 양도계약서에 저작권을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영원히 피해보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동화작가 백희나 씨도 "사실 신인들은 선택의 폭이 좁다 보니 약자일 수밖에 없다"라며 "작가들이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최소한의 보호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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