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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만능주의' '영웅주의' 깊이 밴 보수적 세계관 드러내

 

광풍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SF블록버스터 '인터스텔라'의 흥행세를 두고 하는 말이다.

11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인터스텔라는 전날 하루에만 22만 6,145명의 관객을 보태며 6일 개봉 이래 5일 만에 누적관객수 213만 1,419명을 찍었다. 북미를 제외한 전 세계 흥행 1위의 기록이란다.

인터스텔라는 '다크나이트' 시리즈, '인셉션'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두터운 마니아 층을 거느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름값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그만큼 놀란 감독은 스크린 위에 흥미로운 풍경을 펼쳐놓는 데 탁월한 소질을 지녔다. 그는 인터스텔라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전복시킨 물리학자 아인슈타인(1879~1955)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끌어들여 별과 별 사이의 여행을 다룸으로써 관객들을 황홀경에 빠뜨린다.

우리는 이 지점, 인터스텔라의 최대 강점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이 영화를 삐딱하게 보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이 인류를 위협하는 모든 해악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만능주의'는 곧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 할리우드 히어로물에서 익히 봐 온 짜임새

이 영화는 초반에 극중 인물을 통해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디딘 아폴로11호 사건을 두고 "미국 정부의 사기극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어 "소련이 붕괴된 것은 미국의 사기극에 휘말려 우주 개발 경쟁에 너무 많은 돈을 쓴 탓"이라고 덧붙인다.

극중 미래는 아폴로11호와 관련해 끊임없이 제기돼 온 음모론이 정설로 굳어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로써 인터스텔라는 근대 이후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진 과학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요, 해결책이라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실토한다.

그렇게 인터스텔라 안에서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해 온 얽히고설킨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가 깨끗이 지워진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실제로 인터스텔라를 보면 극단의 양극화를 부른 현 체제의 모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나,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연대와 같은 가치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이라는 단일 국가, 미항공우주국이라는 단일 조직, 소수 엘리트라는 단일 계급의 노력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를 충실히 다지는 데 힘을 쏟는다.

이는 '영웅주의'를 표방하는 할리우드 히어로물에서 익히 봐 왔던 짜임새다. 놀란 감독의 전작들도 이러한 세계관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의 보수적인 성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과학이 빚어낸 유토피아적 세계관…현실 외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터스텔라라는 거함의 뼈대로 삼은 상대성 이론을 확립한 아인슈타인이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나치 독일에 끊임없이 저항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표본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이 핵무기 개발에 쓰인다는 것을 알고는 반핵운동으로 말년을 불태웠다. 그러한 그가 제국의 지배 논리를 강화하는 데 자신의 이론이 활용됐다는 것을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인터스텔라는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속 우주 풍광을 오롯이 빌리고 있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세계관은 스스로 존경의 뜻을 바친 큐브릭 감독의 작품과는 궤를 달리 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직육면체 모양의 신비한 기둥 '모노리스'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던 인류의 모습은 인터스텔라에 그려진, 과학이 빚어낸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까닭이다.

놀란 감독에게 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역사가 에릭 홉스봄(1917~2012)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의 마지막 문장을 전한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과학이든 경제든 정치든 모든 만능주의는 1대 99의 사회를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홉스봄의 말을 다시 한 번 빌려 본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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