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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들기…이젠 '행복' 아니라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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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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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안녕한가요 ⑨] 자본·정치 외압에 시름하는 영화인들

한국 영화산업이 3년 연속 관객 1억 명을 넘어서며 최고의 호황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지금 안녕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관객들은 잔뜩 화가 나 있고 좌절한 영화 제작자들도 울분을 삼키고 있습니다. CBS 노컷뉴스가 화려함 속에 감춰진 한국 영화의 불편한 민낯을 연속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누구를 위한 영화관인가…빼앗긴 '볼 권리'
② 돌려쓰는 극장용 '3D 안경'…이대로 괜찮나?
③ "왜 영화 상영시간에 광고를 끼워넣죠?"
④ "극장 팝콘값 뻥튀기 담합?"…울며 겨자 먹는 관객들
⑤ "영화 대기업 횡포? 짜증을 드러내야 바뀌죠!"
⑥ [단독] CGV, '선택권' 앞세워 '영화값 6%' 편법 인상
⑦ 프리미엄관에 가봤더니…영화 관객은 '봉'
⑧ 뒷짐 진 공정위…영화 관객만 '부글부글'
⑨ "영화 만들기…이젠 '행복' 아니라 '고통'입니다"

자료사진/황진환 기자

 

많은 돈을 들인 규모 큰 영화에는 소위 '공식'이 있다. 빠른 전개, 뚜렷한 선악 구분, 행복한 결말 등등. 이는 가장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이야기를 통해 보다 많은 관객을 불러모아야 하는 '돈벌이' 영화의 숙명이다.

"요새 극장에 걸리는 한국 영화들 비슷비슷하지 않냐"는 관객들의 비판은 규모 큰 영화의 이러한 보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더 많은 수익을 좇는 대기업이 장악한 제작 현장과 극장 환경이 한국 영화의 발전 동력으로 첫손에 꼽히는 다양성을 해치고 있는 셈이다.

◇ "신선한 창의력 뒷전…돈 많이 들인 영화가 미덕인 왜곡"

'공동경비구역 JSA' '해피 엔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건축학개론' '카트' 등 흥행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줄타기 하며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 온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지금 몹시 힘이 든다"는 말로 제작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영화 제작자들이 영향력을 갖고 의미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내던 때가 있었죠. 지금은 영화 콘텐츠를 둘러싼 자본의 힘이 몹시 커졌어요. 관객이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보여지는' 영화가 흥행하는 유통 환경에서 리스크를 안고 도전할 용기를 내기가 어려워진 거죠."

심 대표는 제작자들의 위축을 부른 데는 영화의 제작·배급·상영을 모두 아우르는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신선한 창의력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관객 취향을 조사하고, 모니터 점수를 파악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어요. 멀티플렉스들은 관객이 선택할 수 있게끔 기다려 주지 않아요. 초반 마케팅에 힘쓰고 상영관을 많이 잡는 걸로 흥행이 결정됩니다. 최근 영화제만 봐도 흥행한 영화에 상을 몰아 주는데, 돈을 많이 들인 영화가 미덕이 되는 왜곡이 이뤄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영화적 패기·개성으로 뚝심을 발휘하는 영화가 설 자리를 잃는 거죠."

그는 이러한 산업 환경이 결국 독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는 상생을 추구하는 건강한 영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는 만드는 쪽과 보는 쪽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는 매체예요. 그러면서 완성도도 높아지는 거죠. 하지만 지금 한국 영화의 완성도는 하향 평준화되고 있어요. 아마 관객들도 느끼고 있을 겁니다. 1년에 수십 편의 영화에 투자·배급하는 CJ의 경우 지금까지 1000만 영화를 여려 편 내놨지만, 손해 본 영화가 더 많아요. 기업 입장에서 전체 수익을 따지면 배부를 수 있겠지만, 제작자 개개인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죠."

◇ "이명박정부서 '영화계 블랙리스트 만들어 달라' 제안"

자료사진/황진환 기자

 

심 대표는 올해는 어느 때보다 건강한 영화 환경을 만드는 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해결, 곧 배급과 상영을 분리하는 데는 법적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 만큼 영화계 전반에서 뜻을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 대한 부산시의 사퇴 압력, 영화제 상영작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등급분류 면제 조항 개정 움직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검열의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자본의 시장 장악에다 정권의 외압까지 얹혀지면서 정부의 개선책 마련 의지조차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인은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때 청와대 쪽으로부터 '영화계의 좌파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리스트 작성할 필요도 없다. 다 좌빨로 봐라. 그런 사고방식으로 나라 운영하면 뭐하냐'고 면박을 줬다"며 "지금 영화계에도 이처럼 편을 가르려는 인식을 지닌 사람들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정치적 외압 논란에 휩싸였던, 제주 강정마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미라클 여행기'를 연출한 허철 감독도 "지금 영화인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는데, 자본의 눈치를 보는 한편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적인 외압까지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운영위원이기도 한 허 감독은 "창작을 위한 상상과 비판적 시선을 갖고 있어야 할 감독들이 코너까지 몰려 스스로 주눅들어 있는 분위기"라며 "최근 영진위의 코미디 같은 작태도 그렇고 계속 규제하면서 색깔을 입히려는 모습에 다들 화나 있다. 먹고 살기 힘든데도 영화 만들겠다는 사람들을 제발 내버려 뒀으면 한다"고 말했다.

◇ "수익 좇는 기업경영 마인드서 벗어난 문화·공익적 접근 절실"

 

허 감독은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 철학, 문학을 공부한 뒤 2007년 귀국할 때까지 현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미국과 한국 영화 시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극장 환경이다.

허 감독은 "미국 역시 몇몇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독과점으로 영화를 만들지만, 멀티플렉스에서 개봉 첫 주부터 한 영화로 도배하지는 않는다"며 "한국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창작자의 시나리오 단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을 부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영화 사업을 하는 대기업은 투자 단계에서부터 흥행 공식을 대입해 '이렇게 이렇게 다듬으면 사람들이 많이 보겠다'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고치는데, 그 과정에서 소재의 신선함이 망가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미라클 여행기를 만들었을 때도 강정마을을 다뤘다는 이유로, '본전 뽑을 수 있겠냐'는 이유로 배급사들이 주저하는 걸 보면서 배급까지 직접 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대중과 영화로 호흡하고 싶다는 심정으로 작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관객들이 보면 '좋다'고 말하는 영화들이 상영관에 걸리지 못하는 걸 보면 힘빠진다"며 "공급자인 배급사와 극장 측이 관객 수요를 결정하는 셈인데, 수익을 좇는 일반 기업의 경영진 마인드에서 벗어나 공익성을 띤 문화적 측면에서 영화를 볼 줄 아는, 창작집단과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전문가들이 투자·배급·상영 부문에 포진하는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개봉 첫 주부터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스크린 독과점 문제의 중심에 선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개훔방)의 제작자인 삼거리픽쳐스 엄용훈 대표는 한국 영화계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간단명료하게 요약했다. 수직계열화된 대기업의 '영화자본 독과점'과 '스크린 독과점'이 그것이다.

엄 대표는 "지금 영화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창투사(창업투자회사)를 통해 문화체육관광부 등에서 조성한 중소기업 지원 펀드를 들여올 수밖에 없는데, 이를 대기업 창투사가 편법으로 거둬들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결국 수직계열화된 대기업 구조 속에서 자본 독과점과 스크린 독과점은 서로에게 이득을 준다. 자본 독과점이 투자비를 유리하게 회수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스크린 독과점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자본과 스크린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무기를 쥔 대기업이 영화산업을 매우 빠른 속도로 양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엄 대표의 분석이다.

◇ "한 달 새 6㎏ 빠져…하루 한 끼 식사에 불면증으로 수면제까지"

9일 오후 서울 종로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앞에서 참여연대·민변민생경제위원회·청년유니온 주최로 열린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멀티플렉스 3사의 불공정거래행위 공정위 신고’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9일 서울 종로에 있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점 앞에서 열린 '멀티플렉스 3사의 불공정 거래행위에 대한 공정위 신고' 기자회견 당시 본 엄 대표는 몹시 수척해 보였다. 개훔방 문제로 동분서주해 온 탓에 한 달 사이 몸무게가 6㎏이나 빠졌다고 그는 전했다.

"계속 뛰어다니다보니 식욕이 없어 하루에 한 끼 먹고, 불면증이 생겨 수면제를 먹다보니 살이 심하게 빠지더군요. 낮에는 기운 내서 돌아다니고 이야기하다가도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됩니다. 뜻이 맞는 분들의 응원으로 버티고 있죠."

그는 제작자로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또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의 원인을 제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다고 강조했다. 장애인·아동에 대한 성범죄 처벌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이른바 '도가니법'(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낳으며 세상을 바꾸는 영화의 힘을 증명한 '도가니', 누군가 만들어둔 패턴을 따르는 로맨스 영화에서 벗어나 연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사실적으로 바라본 '러브픽션'은 그렇게 탄생했다.

"작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원칙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2대 8 원칙'이라고 부르는데, 제작자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자로서 영화 전체의 20%를 만들고, 나머지 80%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공유함으로써 완성된다는 얘기죠."

개훔방 역시 이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영화라고 엄 대표는 말했다. 가족영화 형식을 빌려와 경제 환경에 따른 중산층의 붕괴, 가장의 역할 변화 등을 짚어봄으로써 가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끄집어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개훔방에서는 아빠를 등장시키지 않고 아빠 이야기를 해요. 아버지를 등장시키는 뻔함이 아니라, 아빠가 그 자리에 없을 때 아버지라는 존재, 가족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는 마음이었죠."

지금까지 수많은 개훔방 들이 관객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 온 것이 현실이다. 엄 대표는 "한국 영화산업이 외형만 봤을 때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후져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사실상 한 편의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한다는 건 꿈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결국 1000만 영화는 수직계열화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는 그 노력의 결과물로서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1000만 영화들은 가치의 신뢰가 아닌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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