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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오늘 뭐했지?]전설적인 골키퍼 야신, 세상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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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설의 골키퍼 야신이요." 레프 야신의 현역 시절 모습. (자료사진=www.taringa.net)

 

[90년대 문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토토가'는 길거리에 다시 90년대 음악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90년대는 스포츠의 중흥기였습니다. 하이틴 잡지에 가수, 배우, 개그맨 등과 함께 스포츠 스타의 인기 순위가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90년대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90년대 문화가 시작된 1990년 오늘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야신을 아시나요? 축구 팬들이라면 익숙한 이름일 겁니다. 특히 골키퍼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기도 한데요. 골키퍼가 눈부신 선방을 펼칠 때면 야신의 이름을 갖다 붙여 '야신 모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풀네임은 레프 아바노비치 야신. 수많은 사람들이 골키퍼하면 떠올리는, 골키퍼의 전설입니다.

25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90년 3월21일은 전설의 골키퍼 레프 야신이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현지시간으로는 20일이지만, 우리시간으로 21일 야신은 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도대체 야신은 얼마나 대단한 골키퍼였을까요?

야신은 1952년부터 1971년까지 디나모 모스크바에서만 뛰었는데요. 기록이 지금처럼 확실하게 정리되던 시기가 아니라 당시 출전 기록은 확실하지 않지만, 디나모 모스크바 소속으로만 300경기 가량 출전했습니다. 또 1955년부터 1969년까지는 소련 대표팀 골키퍼로 78경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페널티킥만 150차례 막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특히 국가대표로서 맹활약하면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야신이 골문을 지키는 사이 소련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1960년 유럽컵(현 유럽선수권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습니다. 또 1958년 스웨덴 월드컵 8강, 1962년 칠레 월드컵 8강,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4강이라는 성적도 남겼습니다.

당시 야신은 위 아래 모두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 '흑거미', '검은 문어' 등 다양한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못 막는 공은 없다." 레프 야신의 현역 시절 모습. (자료사진=www.taringa.net)

 

야신이 남긴 업적 중 최고는 역시 발롱도르 수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1956년 처음 만들어진 발롱도르는 그 해 최고의 유럽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이후 1995년부터는 선수의 국적 제한이 없어졌고, 2007년에는 후보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됐습니다. 2010년부터는 FIFA 올해의 선수상과 합쳐지면서 FIFA 발롱도르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골키퍼가 받기는 어려운 상이기도 한데요. 야신은 1963년 골키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동도르를 수상했습니다. 이후 올리버 칸(독일), 잔루이지 부폰(이탈리아), 마누엘 노이어(독일) 등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만큼 야신이 대단했다는 의미겠죠.

사실 야신이 처음부터 주목 받는 골키퍼는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종목을 거쳐 1949년 디나모 모스크바에 입단했는데요. 처음에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입단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주전 골키퍼였던 알렉세이 코미츠가 축구단으로 데려왔고, 1951년 자신을 데려온 코미츠의 부상으로 주전 골키퍼 자리를 꿰찼습니다. 이후 야신의 전설이 시작됐습니다.

은퇴 후에는 디나모 모스크바의 단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소련사회주의노동자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1986년에는 선수 시절 다친 다리를 절단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4년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FIFA도 야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최고의 골키퍼에게 야신상을 수여했는데요. 2010년부터는 명칭이 골든글러브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야신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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