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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충돌이 집단학살로 비화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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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98] 민족의 참극으로 기록된 황해도 신천 사건

 

북한을 방문하면 으레 들르는 신천박물관.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대학살의 기록을 보존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미제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인류 역사상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대규모적인 인간살륙 만행을 감행함으로써 20세기 식인종으로서의 야수적 본능을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흡혈귀 신천지구 주둔 미군사령관 해리슨 놈의 명령에 따라 감행된 신천 대중학살은 그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히틀러 도배들이 감행한 오스벤찜의 유혈적 참화를 훨씬 능가하였습니다. 미제침략자들은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잿가루 속에 파묻으라고 지껄이면서 52일 동안에 신천군 주민의 1/4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했습니다"

"나넌 소메루 돌아갔다. 촌사람덜언 멀리 나댕기지두 못했디. 언제 삐끗해서 놈에 눈총얼 받구 죽을디 알갔나 말이야. 45일 동안 날마다 죽음언 도처에 있댔으니까니. 3만 5천명두 넘게 죽었다고 하디만 모르긴 해두 아마 사실일 거이야. 거게다 서남쪽에 몰린 채루 본대와 떨어진 패잔병덜이 신천에서 북상길이 막히자 많이 잡헤 죽어서. 기러구 유격대가 구월산에서 양식 구하러 내레왔다간 쥑이기도 하구 청년단이 저쪽 식구덜얼 찾아내 쥑이기도 하구. 원암리 창고에서 400명으 부녀자하구 아이덜 102명 살해한 건 나중에 주검에 남아 있구 그 틈바구에서 살아난 아이두 있댔으니 엄연한 사실이갔디. 군내 총인구으 1/4이 죽어서. 궁흥면 만궁리에선 리 인구 거이 대부분이 사라젰구 온천면 용당리에선 절반 이상이, 신천리 양장리에선 남자 전원이 죽었다."

이 이야기들은 소설가 황석영의 문제작 <손님>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재미 목사인 류오섭의 6박 7일 동안의 고향방문 이야기 속에 신천학살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회상이 현재와 과거 속에 교차한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읽어보자.

"미국 브루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는 고향방문단 일행으로 북한에 가게 된다. 류 목사의 방북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그의 형 류요한 장로가 숨을 거둔다. 그 며칠 사이 요섭은 알 수 없는 꿈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요섭은 유품으로 남은 수첩에서 요한 형이 박명선이란 여인을 만나기로 했다는 메모를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양로원에서 홀로 살아가는 박명선은 류요한 장로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풀지 않고 동생 요한에게도 냉대로 일관한다.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요한은 화장하고 남은 형의 뼛조각 하나를 챙겨넣은 채 평양으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에 탄다. 여기서 홀연 망자의 유령이 나타나 고향으로 가는 그와 동행하게 된다. 요섭은 초현실화 속에 걸어들어온 듯 멍한 기분으로 평양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고향인 황해도 신천 찬샘골을 찾아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형의 헛것은 그와 하나가 되었다 둘이 되었다 하면서 50여년 전 과거의 아스라한 기억으로 그들을 불러들인다. 요섭은 형이 북에 남기고 온 아들 단열과 해후하는 한편, 고향땅에 세워진 '신천학살박물관'을 참관하며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듣는다. 한국전쟁 당시 '미제'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사건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그곳에서 요한은 당시 기독청년이던 형과 연관된,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끔찍했던 45일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몸서리치며 눈물 짓는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지만 사실은 우익기독교세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만행. 서로를 죽이고 죽던 검은 유령들이 요섭에게 나타나 저마다 그때를 이야기한다. 요한과 요한의 아내, 두더지 삼촌과 이찌로, 이렇게 산자와 죽은자 들의 해원이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 '손님'이란 주체적 근대화에 실패한 우리에게 외부에서 이식된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가리킨다. 작가는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 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을 그려냈다.

소설 속의 역사적 상황을 더 자세히 풀어보자.

해방이 되어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은 항일빨치산 세력이 북한정권의 실세가 되었다. 이들은 겨우 두어 달 동안에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남쪽에 미군정이 있는데다 시간도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전투경험은 많지만 현장 당 활동이나 교육경험이 없는 그들은 지방에서 갖가지 무리한 행동을 한다. 열정이 넘치는 반면에 교조적인 젊은 당원들은 평양은 물론이고 신의주나 함흥, 원산 등지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민족 부르주아지들과 충돌한다. 더구나 당의 이론가들은 거의가 소련에서 교육받고 자라나 조선의 실정을 모르는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또, 시골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요원들은 모두가 이른바 기본계급이라고 하는 빈농층이나 머슴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어느 지방 한 동네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인정상이나 도리상 계급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결국 선택한 것은 복잡한 공산주의 이론보다는 '적개심'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수단이었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조급성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만식이나 그와 비슷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나 지방 향신층으로 이루어진 교계의 장로들을 포용하지 못했다.

우익으로 분류되는 이들 세력은 토지개혁에의 저항, 주일날 예배를 핑계로 대의원선거의 불참, 그리고 테러와 처형으로 맞대결을 벌인다. 이렇게 해서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철천지 원수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전쟁 전까지 형성된 지하교회는 일종의 지하 군사조직으로 탈바꿈한다. 백색테러로 유명한 서북청년단이나 한독당 또는 반공청년단의 정신적 근거가 사실은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토지’를 두고 벌어지는 좌우익 대결은 6.25전쟁을 통해 마침내 폭발한다. '신천사건'의 상세한 기록은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조동환(趙東煥·전 의정부 부시장)씨가 1957년 5월 펴낸 백서 '항공(抗共)의 불꽃-황해도 10.13 반공의거 투쟁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우익 군사령부 명단은 물론 양 진영의 사망자 이름까지 망라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신천사건 백서'로 평가받고 있다.

'백서'에 따르면 살육의 제1막은 1950년 10월 13일에 터졌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게 된 좌익 세력이 우익 인사 수백 명을 예비 검속해 무참히 학살한다. 이에 반발해 지하조직에 속해 있던 반공학생·청년 수백 명이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우익 청년들은 노동당원과 5일간의 혈전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해, 미군 제1기병사단의 북진 통로를 열어준다.

제2막은 퇴각하던 인민군 패잔부대와 공산당 민청간부들이 이미 태극기가 꽂혀있는 신천을 진압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살육을 그렸다.

제3막에서는 이미 좌익진영에 의해 가족을 학살당한 청년단이 자치회로 개편된 후 극렬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노동당, 민청, 여맹, 농맹, 직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는 일련의 과정이 벌어진다.

제4막은 구월산으로 피해 들어간 인민군 패잔병과 남은 노동당원들이 '빨치산'을 조직해 다시 양민학살에 나서고, 이를 진압하려는 자치회와 또 한차례 충돌과정에서 벌어지는 대량 살상극이다.

제5막은 후퇴했던 인민군과 구월산 빨치산들이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신천을 재장악하려고 할 때 일어난다. 미리 구금되었던 노동당·민청 간부들과 그 가족들은 의거군에 의해 처형된다. 이어 미처 철수하지 못한 반공무장대 가족들이 다시 한번 빨치산들에게 학살당한다.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신천에서는 양쪽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사람들 사이에 피로 피를 씻는 보복이 벌어진 것이다. 이 와중에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신천군 주민의 1/4이 되는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됐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신천 학살사건을 소재로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천학살사건은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 그림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 유채화에서는 학살을 당하는 이가 한국인인지, 그리고 학살을 자행하는 이가 미군인지도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이와 처녀들의 모습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그림은 미국의 외교적 압력 때문에 어디에도 전시되지 못한 채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후 ‘피카소’란 이름은 대한민국에서 금기시되었다.

1969년 서울지검 공안부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 수채화 물감' 등을 생산하는 삼중화학공업 대표 박정원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그 제품의 판매와 광고를 금지시켰다. 세계적인 화가가 대한민국에서는 '빨갱이'의 상징이 된 셈이다.

소설 <손님>에서 묘사하는 양민학살의 참상은 너무 참혹해서 인용하기가 두려울 정도이다.

한 구절만 읽어보자. 인민군 남매가 청년단에게 잡혔을 때의 모습이다.

"이것덜이 오뉘라네.
앞에서 한 인민군의 코를 꿴 철삿줄을 잡고 끌고 오던 청년이 당사 보초 앞에서 떠드넌 소리가 들레왔디.
오널 벌써 멫번채가. 한 열대여섯 되넌 모낭이야.
다른 데서두 많이 잡헤왔나?
야, 총이나 뺏고 즉결하구 오디 머 하러 여까디 끌구 오네?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고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가두만. 한참이나 있다가 복도가 크게 울리도록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어둑어둑했넌데 기쎄 그 아이덜얼 쭉 빨가벳겨개지구 끌구 나오는 거이야. 내무서 뒷마당으로 데레가넌 모낭이디. 단발머리넌 궁둥이도 작구 다리가 참새 같더라. 두 팔루 가슴얼 싸안구 머리럴 숙이군 오빠 뒤를 따라가멘서 목놓고 울어서. 기것덜이 담장 너메루 사라지더니 총소리가 들리더라. 아아, 하디만 지옥언 기런 거이 아니야. 나넌 까딱했으면 내 하나님얼 버릴 뻔하였다."

과연 미군이 신천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자행했을까?

 

미 제1기병사단이 평양의 기차역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신천학살사건이 해리슨 중대장이 지휘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당시 전황을 살펴보자.

유엔군은 10월 9일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양이었다. 평양 점령을 위한 주공 부대로 미 제1기병사단이 선정됐다. 1기병사단은 최단거리 접근로인 개성-금천-사리원-황주-평양으로 이어지는 1번 도로 축선을 따라 진격했다.

조공은 국군 1사단으로 임진강의 고랑포 일대에서 시변리(토산)-신계-상원 축선을 따라 평양의 동측방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이 두 부대는 서로 먼저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북진을 했다. 파죽지세로 평양을 향해 돌진하던 2개 사단은 38선을 돌파한 지 10일만인 10월 19일 거의 동시에 평양에 들어섰다. 이 짧은 10일 사이에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양민학살에 나설 틈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적의 수도 평양이라는 더 큰 먹이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후퇴할 때도 마찬가지다.

평양을 점령하고 청천강을 넘자마자 11월 말 유엔군은 숨어서 기다리던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대오가 무너진 채 정신없이 38선 남쪽으로 후퇴를 했다. 한 달만에 청천강에서 38선까지 쫒아온 중공군은 1951년 1월 1일 6개 군단을 동원해 38선을 돌파하고 서울로 쳐들어온다. 이렇게 해서 비극적인 1.4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무질서한 후퇴 기간에 신천이라는 시골마을에 미군이 몰려가 수만 명을 학살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면 북한은 왜 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 계속 ‘미제의 만행’이라고 주장할까?

소설 <손님>에서 류오섭 목사를 안내하는 북한 지도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끼리는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모두 외세의 탓이라고 해둡세다"

남의 탓이라고 해두면, 우리 민족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상처는 저절로 아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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