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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배후인물 '약산 김원봉'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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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17] 일제가 현상금 300억원을 내건 독립투쟁 지도자

영화 <암살>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 (사진=영화 '암살' 스틸컷)

 

이 사진은 영화 <암살>의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이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자 암살작전을 뒤에서 지휘했던 '약산 김원봉'이 빈잔에 고량주를 부으면서 백범 김구에게 말한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어."

그리고는 그들의 이름을 한명씩 거론하면서 슬퍼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백범 김구는 잘 알고 있지만 약산에 대해서는 생소한 인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라고 비난하고, 북에서는 지도자 김일성 수상에게 반기를 든 '반동'이었으니. 이렇게 해서 약산은 해방 후 70년 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의열단'을 결성한 김원봉 "일제의 주구를 처단하라"

군복 차림의 약산 김원봉. 해방될 때까지 총과 폭탄을 놓지 않았다. (KBS 다큐영상 캡처)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9일 일단의 조선청년들이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민 반씨 집에 모였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청년 13명은 밤이 새도록 토론을 벌였다.

이들 모두 3.1운동 당시 조선민족이 맨손으로 일제에 맞서다 총칼로 진압당하는 모습을 보고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한다는 입장에 공감했다.

단체 이름은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자를 따서 '의열단'으로 명명했다. 창립단원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맏형격인 '의백'(醫伯)으로 김원봉을 선출했다. 이들 13명 가운데 해방이 될 때까지 변절하거나 투쟁에서 탈락한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의열단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이른바 '7가살'(七可殺)을 정했다.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2. 군부의 수뇌
3. 대만총독
4. 매국노
5. 친일파 거두
6. 왜적의 밀정
7. 반민족 토호열신(악덕 지방유지)

의열단은 '7가살'과 함께 5곳의 '파괴 대상'도 선정했다.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주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

의열단이 태동한 곳이다. 김원봉 등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반씨 집이었던 이곳에서 의열단을 창설했다. (사진=사진작가 고 권태균 제공)

 

의열단의 창립단원 대부분이 나라를 잃은 후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간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 학교에서 사격과 폭탄 제조, 투척 방법 등을 배웠다. 단원들이 늘어나자 김원봉은 이렇게 선언했다.

"조선총독 죽이기를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매년 2회 놀라게 하면 그들 스스로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부산경찰서 전경. 이곳에서 의열단의 첫번째 폭탄이 터진다.

 

"쾅~!"

의열단이 창립된 후 10개월이 지난 1920년 9월 14일 아침 부산경찰서에서 갑자기 폭음이 들렸다. 의열단원 박재혁이 던진 폭탄이다.

박재혁은 이날 당당하게 부산경찰서를 들어갔다. 그는 중국 고서적상으로 위장하고 경찰서장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박재혁이 귀한 서적을 보자기에 싸왔다고 둘러대 서장 하시모토를 만날 수 있었다. 하시모토는 책대신 폭탄을 정면으로 맞고 그 자리에서 폭살당했다. 박재혁도 심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의열단의 첫 번째 거사였다.

다시 3개월 후 이번에는 밀양 출신의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아쉽게도 불발이어서 인명은 살상되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1921년 9월 10일 의열단원 김익상이 "일주일 후에 돌아오겠다"면서 폭탄 2개를 갖고 베이징에서 경성으로 출발했다. 그는 전기회사 공원으로 위장하고 남산의 조선총독부를 들어갔다. 김익상은 2층에 올라가 폭탄 2개를 잇따라 던졌다. 1개가 터지면서 2층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현장을 유유히 빠져 나간 김익상은 경성을 출발해 평양~신의주~안동~봉천을 거쳐 무사히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도착한 날이 9월 17일이니 자신이 장담한 대로 꼭 일주일만에 돌아온 것이다.

의열단원들이 남긴 사진. 이들 모두 살아서 해방을 보지 못했다.

 

김원봉이 지휘하는 의열단의 투쟁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1922년 3월에는 상해에 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권총과 폭탄으로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이 사건은 비록 실패했지만 상해를 비롯해 조선과 일본까지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데 이어 연이틀 경성 도심에서 일경 1,000여 명이 포위한 가운데 시가전을 벌이다 최후의 일발로 자결했다. 김지섭도 일본 궁성 이중교에 폭탄 3개를 투척했으나 모두 불발이 되었다.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여러 명의 일인들을 사살한 뒤 자결했다.

의열단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상해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도 '한인애국단'을 결성해 의열투쟁에 나섰다. 그래서 이봉창은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윤봉길은 일본군 수뇌부를 몰살시킨 것이다.

충격을 받은 일제는 김구에게는 60만원의 현상금을, 김원봉에게는 100만원을 걸었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약 200억~3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활동을 벌였던 김성숙 선생은 이렇게 그를 회고했다.

"김원봉은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우더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지요.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김원봉과 김구는 닮았습니다."

◇김원봉, 의열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선회하다

1939년 10월 10일 설립 1주년을 맞은 조선의용대가 중국 계림(桂林)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1920년대 6년간 의열투쟁을 이끌었던 김원봉은 간헐적인 테러의 한계를 깨닫고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면 군대를 갖춰야 한다. 문무합일로 된 혁명간부 훈련반을 창설해 중국과 조선 본토에서 일본 강도를 타도해야 한다."

이에 따라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2년 10월에서 1935년 9월까지 만 3년동안 조선혁명군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여기서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독립군 전사를 양성했다. 저항시인 이육사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김원봉은 군대 창설을 서둘렀다. 마침내 1938년 10월 10일 오전 한구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던 동북항일연군이 소련령으로 피신한 뒤 최초로 중국 본토에서 생긴 조선 독립군이다.

조선의용대가 후퇴하면서 또는 적지에 잠입해 쓴 선전구호. (사진=사진작가 고 권태균 제공)

 

조선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에 대한 반전활동과 인원 충원을 위한 공작활동을 벌였다. 간혹 중국군을 따라 유격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원들의 불만은 컸다. 그들은 일본군이 점령한 화북이나 만주로 진출해 격렬한 전투를 하기를 희망했다.

김원봉은 눈물을 머금고 이를 수락했다. 1941년 4월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화북에 있는 태항산으로 떠났다. 김원봉도 같이 가기를 원했으나 태항산 일대에 포진한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의 반대에 부딪혔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김원봉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남은 대원은 광복군에 편입해 제1지대로 개편되었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쓸쓸하게 귀국한 후 친일경찰에 시달리다 월북의 길을 택하다

해방된 후 조국에 돌아와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그가 남긴 마지막 사진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진과 2진으로 나눠 환국했다. 2진으로 돌아온 김원봉은 조국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좌익과 우익 모두 그를 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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