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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화법'은 지금의 몰락을 예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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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자료사진)

 

"대선 후보 등록을 위해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직을 내놓으면서 '저는 오늘로 지난 15년 동안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눠왔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라고 실수할 때부터 조짐이 있기는 했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각종 사건사고에도 꿈쩍 않고 공무원들을 나무라는 태도는 행정부 수반이라기보다는 제왕에 가까웠다. 한국말 모르냐며 꾸짖고 자기 말에 토 달지 말라고 하는 건 또 어떤가. 하지만 2015년의 종교적 수사는 남다른 면이 있다. 이제껏 있었던 어문규범 위반을 반복하긴 하지만, 그 자신이 대통령에서 제왕으로, 나아가 이제는 신적인 자리에 있다는 식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문화사회연구소 김성윤 소장은 사상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를 부른 박근혜 정권의 지금을 이미 예견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지난 여름, 계간 '문화/과학 2016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 '박근혜 화법, 헛소리에 담긴 모순적 징후들'이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CBS노컷뉴스는 김 소장의 동의를 얻어 이 흥미로운 글을 요약하고 전문도 함께 싣는다.

이 글에서 김 소장은 '우주' '혼' '에너지' 등이 포함된 박 대통령의 신비주의적 발언을 예로 들며 "대통령 직분으로 전혀 거리낌 없이,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정교분리의 금기를 깨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2015년 어린이날 행사에서 대통령의 한 마디는 인상 깊었다. 어린이날이었으니 화법이 유아적일 수 있는 점은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때때로 어른들은 동심을 앞에 두고 무장해제된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무슨 대단한 가면을 썼다거나 그 뒤에 뭔가 엄청난 걸 숨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015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해에 대통령은 신비주의적인 어록을 유난히도 많이 남겼다. 어린이날을 전후해서 경제인과 관료들에게도 비슷한 논지의 이야기를 이미 전달했던 바 있다."

그는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볼 문제는 종교적 수사의 등장이 왜 유독 2015년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는가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박 대통령)의 세계관과 세계상에 어리둥절했지만, 대개는 비정상적인 화법의 일환으로만 여겨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왜 하필 2015년일까. 개인적으로 종교에 심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국민 수준을 그쯤으로 보고 국정 지지를 호소하려는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 둘 모두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녀 자신이 처한 어떤 정치적 곤란을 징후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을까."

"우주 유기체론에 이르러 대통령은 단순한 국민 대표가 아니라, '하늘'의 '메시지' '응답'을 약속하는 종교 지도자쯤으로 변신하는 듯하다는 것이 김 소장의 진단이다.

"유기체론적 설정에서 지도자의 위치는 하나의 공점(empty point)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같은 세계관에서 종종 초월적 지도자들이 '하늘-우주'와 '백성-개인'을 연결시키는 매개자이자 사실상 독점적 주권자로 자리매김 된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가 배워서 아는 바와 같다. 예컨대 하늘의 응답이 있을 거라고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응답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자기 자신을 초월론적인 구도에 상정해야만 그와 같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 그녀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그래픽=김성기 기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잇단 거짓 해명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에 대해 김 소장은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박근혜 정권이 불안한 토대 위에서, 심지어 능력조차 부재한 상태에서 출발했었다는 점이고,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우려 무언가 시도하면 할수록 그것이 화가 되어 무언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과잉된 상태를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사실 이 말은 그녀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박근혜 정권의 지금을 만들어낸 우리 사회 기득권의 공모에도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박근혜의 말실수가 지배세력의 무능함과 악덕을 반증해주는 미덕을 가진 것이었다면, 그녀의 집권 과정과 언술들은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가 한군데에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 같은 담론들 가지고는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안녕이 보증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중략) 오히려 다른 관점에선 그런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더 안정적인 지배를 꾀할 수 있는 길이었던 게 아닐까. 요컨대, 박근혜 화법을 통해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허상에 불과했으며 둘은 사실상 같은 몸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발견될 수는 없는 걸까."

김 소장은 끝으로 "그래서 나 역시 때가 되면 박근혜 화법에 귀기울여지는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실수를 가지고 조롱하고 비웃는 것만으로 정치적 스탠스를 취했다고 자기 상상하는 대중적 관행에 대해서도 우려가 되곤 한다"며 "지금 대목에서 중요한 건 박근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라고 강조하고 있다.

'박근혜 화법, 헛소리에 담긴 모순적 징후들' 전문
※ 이 글은 문화사회연구소 김성윤 소장이 계간 '문화/과학' 2016년 여름호에 기고한 것이다.

놀이로 전락한 박근혜 어록

글을 쓰기 전 잠깐 그런 생각을 해봤다. 2백자 원고지 80매 분량을 아예 '박근혜 화법'으로 채워보면 어떨까 하는. 뭔가 재기발랄한 글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 며칠 전 어느 자리에서 강연했던 녹취록을 받아보고는 생각이 확 바뀌었다. 분명 내가 말한 것일 텐데, 그리고 그걸 그대로 타자 쳤을 뿐일 텐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박근혜 화법과 나의 화법이 가진 상동성! 둘 사이에 다르지 않은 점을 발견하곤 애당초 계획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정말로 박근혜 화법으로 글을 썼다간 독자들이 (독해가 아니라) 해독하는 데 폐만 끼칠 수 있으니 그런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런가 하면 묘한 잡념이 들어서 글쓰기가 버거운 면도 있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의 말하기를 비평한다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물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비평 가능하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 대통령 말마따나 사람 나고 대통령 났지, 대통령 나고 사람 났나. 대통령이라서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만큼 후진 생각도 드물다. 똑같은 사람이고 단지 추첨운이 좋아서 5년 동안 우리를 대표하고 있을 뿐 아니겠나. 대통령이라서 달라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건 자기를 모시고 섬길 것을 기대하는 '그 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박근혜 화법을 분석하고 비판한다는 건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고된 일이다. 그것은 어느 순간 나 자신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춰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 대신 글이라는 기호 뒤로 나 자신의 맨얼굴을 숨겨 넣고만 있을 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글이 써질 리가 있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대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면서 박근혜 화법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던 정치적 비밀도 상당 부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본론은 일찌감치 써놓고도 이래저래 만지작거리다 부끄러운 자기 곤란을 드러내면서 겨우 겨우 서문을 시작하는 신세가 됐다. 단지 하나의 결심만 남았을 뿐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그녀의 화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은 결국엔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본론에도 몇몇 열거해놓긴 했지만, 세간에 도는 박근혜 어록은 이미 유명하다. 심지어 어록을 정리하고 그에 대해 논평하는 게 하나의 놀이 문화로 정착했을 정도다. 어록 하나하나 곱씹어보는 게 그만큼 유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어록들이 말도 안 되는 것 투성이어서 웃음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인지부조화 경험을 제공한다. 말이 안 되니까 그녀의 지적 수준을 조롱하는 게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조롱, 즉 웃음의 두 번째 원칙이다. 게다가 이 놀이에는 수행적 측면까지 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아내려고 추리에 나서는 것이다. 박근혜 어록을 살펴보다보면 우리는 요즘 세상에 흔치않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지난 4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시청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비상벨이 울린 모양이다. 지난 봄 청와대에서 박근혜 '비유집'을 출간했다. 역대 정부 최초로 있는 일이라고 한다. 재밌는 일이다. '어록'이라 제목 붙이는 게 더 좋았을 법한데, 어록집은 참여정부 때 출간한 적이 있으니 최초로 비유집을 발간한다는 정신승리격 주장이다. 무엇보다 '박근혜 어록' 자체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관용적 표현으로 통용되다보니 그런 민감한(?) 제목은 피해야 했을 것 같기도 하다. 비유집이라지만 막상 뜯어보면 마음 아플 정도다. 사람들이 구입하게 되면 또 하나의 씹는 재미를 선사하는 게 아닐지 걱정된다. 대통령의 센스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우문현답', '창가문답'처럼 전형적인 아재개그들이 눈에 띤다. 각각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창'조경제의 '가'시적 성과는 '문'화융성에 '답'이 있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대통령 또는 참모진이 저걸 짜내려고 얼마나 고심했을지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말장난 개그를 선호하는 집단이 있긴 하다. 어린이, 중장년, 그리고 부장님. 이런 특성을 일찌감치 간파했었는지, 보수논객 전여옥이 박근혜 화법을 두고 '말 배우는 어린이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토크'라고 평했던 건 유명한 일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화법에서 주술 호응 없는 만연체 비문을 지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대통령의 언어 능력이 한국말 배우는 단계에서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것쯤으로 치부된다는 이야기다.

때때로 인신공격에 가까울 정도로 놀림감이 되는 것도 이런 맥락들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한 개인의 지적 수준과 인격을 모독하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사가 모두 충족되는 건 아니다. 어쨌든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5년인 이상 그녀의 화법이 가지는 심층적 의미를 좀 더 진중하게 뜯어볼 필요는 있다. 풍자할 때 풍자하더라도 말이다. 심지어 막상 뜯어보니 그 안에 아무것도 없더라는 게 확인되더라도 말이다. 말실수, 횡설수설, 동어반복, 동문서답, 에너지론, 비문, 유체이탈, 시대착오…. 일단 어떤 결론이 나오더라도, 박근혜 화법의 세계로 들어가기나 해보자. 어쨌든 그게 우리의 현실이니까.

어문규범 외에도 붕괴된 것들

어문규범이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해 문법이나 어법을 가리킨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어문규범에 어긋났다고 말한다. 박근혜는 횡설수설, 중언부언, 동어반복으로 듣는 사람을 곤란케 하기로 유명하다. 박근혜 화법이라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을 대할 땐 얼른 자리를 피해 상대를 하지 않는 게 상책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인지라 쉽사리 내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더 곤란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애너그램(anagram) 운운하기도 한다. 단어나 문장에서 글자 순서를 바꿔서 다른 단어나 문장으로 만드는 놀이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해리 포터' 시리즈의 호그와트(Hogwarts) 마법 학교가 'Ghost War'의 애너그램이란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 중에 하나다. 그렇지만 박근혜 화법을 두고 애너그램에 견주는 건 불편부당하다. 그녀의 화법에서 특별한 암호 같은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걸 의도해서 어문규범을 어긴다는 건 더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당장 몇 가지 사례만 봐도 그렇다.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 그게 제 입장이었어요." "정부가 어떻게 하면은 이산화가스, 산소가스를 배출하는 데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가지고…." "이번 논쟁을 전화위기의 계기로 삼아서 우리 모두가 흔들림 없이…". 애너그램에 준할 수준이 되려면 적어도 듣는 사람이 '덕후'와 같은 자세로 오랜 기간 동안 심사숙고해서 원뜻을 발견해내야 할 정도는 돼야 한다. 아니면 재미라도 있든가. 하지만 그녀의 어법은 단순한 말실수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굳이 '우주의 에너지'를 집중시키지 않더라도 어떤 뜻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물론 그녀는 몇 마디 비문을 남기고 언제나 자리를 떠나버린 채여서 뒤늦게 뜻을 헤아린 우리로선 어떤 대답도 전해줄 수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청와대에서 비유집까지 만들면서 선전하는 것처럼 그게 재밌냐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재밌는 애너그램 사례를 얼마간 알고 있다. "장난 나랑 지금 하냐? /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 할까? / 돌아이맨 슈퍼왔다 / 구로털디지단지 / 아가리또 고자이마스". 하지만 이런 말장난을 연예인이 아니라 대통령이 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물론 웃기려고 했다면 대통령이 해도 무방할 순 있다. 하지만 박근혜의 애너그램(?)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구설에 오른다. 첫째, 재미가 없다. 이 부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구차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둘째, 때때로 걱정스럽다. 청와대야 말장난으로 포장하긴 하지만 대통령의 언어 습득 수준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군사평론가 김종대에 따르면, "가장 진정성 있고 근엄해지는 순간에서 나오는 말실수"로서 "자기 붕괴된 어떤 멘탈 상황"에 해당하며 결과적으로 "집중력을 순간적으로 잃어버리는, 술 취해서 필름이 끊어진" 것과 같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3차 촛불집회 참석자들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제공)

 

물론 말실수 몇 개를 가지고 어떤 사람의 지적 수준을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수 있다. 우리들 대다수는 그녀와 달리 조금 더 사려 깊은 사람들이다. 언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더라도 피하고 무시하기보다는 그 같은 불행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헤아리고자 할 것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고 다시금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어려움도 있고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것을 극복해 나가는 열정이 어디에서 생기느냐면 이런 보람, '나라가, 지역이 발전해 가는 한 걸음을 내딛었구나', 그런 데서 어떤 일이 있어도 참 기쁘게 힘을 갖고 나아가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2014년 12월 17일,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 오찬)

"이게 창조경제예요. 아이디어와 소비자가 뭘 불편해 하는가에 착안해서 이렇게 함으로써 꿀이 새롭게 태어나고 부가가치가 굉장히 높아졌어요." (2016년 3월 17일, 부산 창조경제혁신센터 방문)

애너그램에 이은 두 번째 주인공은 비문이다. 박근혜의 문법 파괴는 악명이 높다.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을 깨뜨린다. 지시어를 남발한다. 빈번한 접속사와 끝없는 종속절로 좀처럼 문장을 끝맺지 못한다. 그녀의 말이 중언부언 내지 횡설수설로 들리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 번째 예문을 보자. '간절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마음 먹으면 어떤 의도로 한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순 있다.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 '그런 것을', '이런 보람', '그런 데서'가 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전형적인 지시어 남발이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알아맞혀야만 한다.

어쩌면 권위란 신비스런 화법과 함께 도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 대단한 수수께끼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두 번째 예문이 대표적이다. '아이디어가 무언가를 불편해 한다.' 관점에 따라선, 꿀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쯤은 시적 허용으로 인정해줄 수도 있다. 상품과 화폐가 신격화되기도 하는 세상에 낯부끄러운 표현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도 아닌 관념을 의인화한다는 건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정말로 아이디어가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언어 능력 부족으로 인해 말실수를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박근혜의 문법 체계가 유럽어 어문구조와 유사하다는 주장도 편다. 언어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 한국어 실력에 문제가 있다는 건 분명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옹호론자들은 대통령의 불어나 영어 연설을 통해 그런 면면을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어 잘 한다는 칭찬이 정말 잘해서인지 아니면 비불어권 외국인 대통령 치곤 잘 한다는 칭찬인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영어 연설도 즉흥적인 게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원고나 프롬프터를 활용한 것이기에 의심스러운 게 없진 않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그녀가 한국어마저도 외국어처럼 구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보람"과 "나라가, 지역이 발전해 가는 한 걸음을 내딛었구나" 사이에는 'that'이 생략되어 있고, "아이디어와 소비자가 뭘 불편해 하는가에 착안해서"는 "Being inspired by ideas and what consumers feel discomfort" 따위를 직역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언어 능력 자체보다는 외국어 습득에 따른 어문규범 혼란이 문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국말을 잘 해야 한다. 외국어 능력이 핑계가 될 순 없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하자면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정작 어문규범에 있어선 너무나도 비정상적이기만 하다. 굳이 이해를 해주자면 이런 가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남다른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살아야만 했던 생애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 투표장에 이끌렸듯,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적이란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그녀의 삶이 '정상'적이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하지 않은가.

단적으로, "열 살이던 1961년부터 1979년까지 20년 세월을 최고 권력의 장막 속에 살았으며 아버지의 사망 이후에 은둔생활 등 박 대표의 인생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1989년 박정희 10주년 추도식을 마친 뒤 박근혜는 이런 일기를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지만 내 마음은 몹시 울적하다.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으면 마음의 고통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침울한 생각뿐이다. 80년대는 다시 돌아보기도 싫다.'

이른바 정상가족이 아닌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사회화되기 어렵다고 비아냥거리려는 건 절대 아니다. 반대로 비극적인 가족사를 핑계 삼아 그녀를 동정하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고립된 삶을 살아왔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그녀가 발휘하는 불통 능력은 그녀의 지지자들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특징 가운데 하나 아닌가. 갈수록 박근혜는 공식적인 자리에, 특별히 한국 국민들과의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되는 말실수 때문에 부담스러워서일까. 성격 탓일까. 아무튼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2015년에 등장한 종교적 언술들

대통령을 비롯해 (가까이 있든 등을 돌렸든) 그 주변인들에겐 상식, 즉 공통감각이 문제가 되곤 한다. 친박 좌장 최경환은 지난 총선에서 여당 지지를 호소하면서 표를 주지 않으면 "부산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이 세월호와 함께 진도 앞바다에 좌초"하게 된다고 했고, 멀박 좌장 김무성은 저출산 대책으로 조선족 귀화를 언급해 어리둥절케 했는가 하면 알바비 떼인 청년들에게 좋은 경험한 셈 치라고 독려(?)해서 공분을 샀다. 심지어 친동생 박근령은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건 바람피는 남편 소문내는 것"이라며 불행 삼남매의 현주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확실히 어떤 선을 넘어선 사람들이다. 공통감각의 부재라 부를 만하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평할 만하다.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2015년 어린이날 행사에서 대통령의 한 마디는 인상 깊었다. 어린이날이었으니 화법이 유아적일 수 있는 점은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때때로 어른들은 동심을 앞에 두고 무장해제된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무슨 대단한 가면을 썼다거나 그 뒤에 뭔가 엄청난 걸 숨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015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해에 대통령은 신비주의적인 어록을 유난히도 많이 남겼다. 어린이날을 전후해서 경제인과 관료들에게도 비슷한 논지의 이야기를 이미 전달했던 바 있다.

"우리가 경제 재도약을 염원하고 어떻게든지 경제활성화를 해야 된다고 노력하고 있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염원하는데 그거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 바로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것이 바로 메시지라고 우리가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 3월 19일, 무역투자진흥회의)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 5월 12일, 국무회의 시작 전)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고,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015년 11월 10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 국무회의 발언)

에너지로 시작해서 에너지로 끝나는 박근혜 특유의 '에너지 전체론'은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저게 과연 정상적인 사고방식인지 의문을 던진다. 관념을 의인화하는 걸 넘었다. 심지어 그 자신이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관념론자라는 사실도 넘어섰다. 저쯤 되면 어떤 강한 신념을 가진 것으로 밖에는 해석할 도리가 없다. 가톨릭 신자라 하더라도 대통령 직분으로 전혀 거리낌 없이,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정교분리의 금기를 깨버렸다. 물론, 시청 앞 광장을 통째로 봉헌한 시장도 있었고 툭하면 정치권을 넘나드는 목회자들도 있으니 '혼이 비정상'인 대한민국에선 더는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녀의 세계관이 건국 이래 대통령 중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전근대적이란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성에 기반해 세상을 해석하고 또 그런 한에서 세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좀 더 강한 해석을 해보면, 자기-우리-나라-역사-하늘-우주로 이어지는 일련의 존재론적 질서는 기독교 세계관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있어 왔던 (유교사상이나 동학사상 같은) 모종의 종교적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다. 그만큼 인구의 특정 집단에게는 낯설지만은 않은 언술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까닭에 합리적 의식과 시대정신 부족을 마냥 비난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세계관과 사고방식이 적잖은 노년 지지층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녀의 화법이 저학력 노인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젊은 층으로 추론되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그냥 말 못하는 60대 할머니일 뿐"이라는 식으로 원색적인 비난을 섞어가며 박근혜 화법을 노인들의 화법과 동일화하곤 한다. 박근혜 화법에서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할 게 아니라면,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언술을 통해 어떤 효과가 발생하느냐는 데 관심을 둬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경제활성화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같은 특정한 정치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적 수사를 동원하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와 유사한 세계관과 화법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한 설득을 넘어 확고한 신념을 품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실제로 얼마나 수용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긴 하다. 오히려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반대자들로서는 더 강한 반감을 품게 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특정 지지층만을 포용하고 나머지는 내버리는 정책과 언술을 거듭한다.

지난 19일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제4차 촛불집회에서 경찰의 차벽에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평화를 상징하는 꽃 등의 수많은 스티커가 붙어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더 중요한 사실은 말의 맥락에 각인되어 있는 전형적인 '일체유심조' 논리 같은 것들이다. 신보수주의라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구시대적 도덕률에 가깝다. 하지만 어쨌든 '기도'하고 '염원'하며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 전개 방식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개인들의 자기책임과 등치시키는 코드를 함축하고 있다. 그녀의 책임 떠넘기기 습관은 너무도 흔한 수법처럼 해석되지만, 따지고 보면 화법 자체가 이색적이어서 눈에 띨 뿐이지 거의 모든 위정자들이 내세워왔던 대중 담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건 아닌 셈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른다. 꼼수를 알기 쉽게 부려준 덕에 적어도 사태 파악을 용이하게 해주는 미덕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볼 문제는 종교적 수사의 등장이 왜 유독 2015년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는가 하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세계관과 세계상에 어리둥절했지만, 대개는 비정상적인 화법의 일환으로만 여겨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왜 하필 2015년일까. 개인적으로 종교에 심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국민 수준을 그쯤으로 보고 국정 지지를 호소하려는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 둘 모두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녀 자신이 처한 어떤 정치적 곤란을 징후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을까.

우주 유기체론에 이르러 대통령은 단순한 국민 대표가 아니라, '하늘'의 '메시지' '응답'을 약속하는 종교 지도자쯤으로 변신하는 듯하다. 유기체론적 설정에서 지도자의 위치는 하나의 공점(empty point)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같은 세계관에서 종종 초월적 지도자들이 '하늘-우주'와 '백성-개인'을 연결시키는 매개자이자 사실상 독점적 주권자로 자리매김된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가 배워서 아는 바와 같다. 예컨대 하늘의 응답이 있을 거라고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응답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자기 자신을 초월론적인 구도에 상정해야만 그와 같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대선 후보 등록을 위해 국회의원직을 내놓으면서 "저는 오늘로 지난 15년 동안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눠왔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라고 실수할 때부터 조짐이 있기는 했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각종 사건사고에도 꿈쩍 않고 공무원들을 나무라는 태도는 행정부 수반이라기보다는 제왕에 가까웠다. 한국말 모르냐며 꾸짖고 자기 말에 토 달지 말라고 하는 건 또 어떤가. 하지만 2015년의 종교적 수사는 남다른 면이 있다. 이제껏 있었던 어문규범 위반을 반복하긴 하지만, 그 자신이 대통령에서 제왕으로, 나아가 이제는 신적인 자리에 있다는 식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대망상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세월호 1주기 현안점검회의에선 안전 대책으로 간첩 신고 운운할 정도로 시대착오적이었고, 메르스 긴급회의에선 정부가 대처 방안을 밝혀야 한다며 기가 막힌 유체이탈 능력으로 보였다. 국회심판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책상을 수차례 내리치며 권위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녀가 우리와 전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과 평가만으로는 적절성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 감정적 거부감부터 앞선다. 그런 대통령과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건 블랙코미디로 자조하기엔 차라리 비극에 가깝지 않은가.

이번 20대 총선 결과에 대한 청와대 논평을 보자. 언뜻 보면 비슷한 화법이 반복됐다. 두 줄 분량이었다.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길 바란다. 국민의 이러한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총선 전만 해도 레임덕 걱정하던 <동아일보>조차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흔한 표현조차 없다. 마치 총선 결과와 청와대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남의 일을 논평하는 것 같다"면서 "오히려 문면을 살펴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해온 '국회 심판론'이 먹힌 것처럼 해석될 소지도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체이탈, 시대착오, 권위적 제스처 같은 화술들은 차라리 방어적 차원에서 나오는 언술과 행동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사실 같은 논평을 두고 대다수 언론들은 논평의 '너무 간단'함에서 청와대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읽어냈다. 실제로 참모들은 원내 1당을 내준 것에 망연자실해 하며 정국 수습책을 찾지 못해 곤란에 빠졌던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요컨대, 같은 현상을 두고도 보는 사람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감정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되짚어보면 박근혜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논란의 연속이었다. 안정적인 지지율을 기록해왔다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권지지 기반이 늘 문제였다. 심지어 지지율마저 허상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대통령과 정권의 국정 수행 능력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보수 여당에 대한 관성적 지지가 섞여 있고, 심지어 영애 시절부터 있어왔던 노년층의 셀러브리티 문화가 한몫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개의 여론조사들이 그렇듯 전화 조사 방법 문제 때문에 조사결과 자체를 신뢰하기도 어렵다.

굳이 요즘이 아니더라도 현 정권은 언제나 레임덕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개표 논란과 더불어 국정원 개입 사건 때문에 흔들렸다. 세월호 참사로 정치적 반대 세력을 규합하게 했고, 메르스 사태로는 총체적 무능력에 확인 도장을 찍었다. 친박세력의 독선, 오만, 불통은 총선에서의 패배 원인으로 지적되기까지 했다.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수첩인사'의 거듭된 실패와 불통 시비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수많은 말실수들로 인한 지적·도덕적 헤게모니의 실추까지!

불안감에 휩싸인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선택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우울에 빠져 동굴로 들어가거나, 해야 할 말과 일을 금세 잊어버리거나, 대상을 골라잡아 적대하거나, 산만하게 행동하며 높은 곳에 자꾸 오르려 하거나, 등등. 불행히도 박근혜 정권은 이 모든 것을 다 선택했던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모든 곤란 속에서 박근혜 자신이 종교에 의존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의 사생활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문제이므로 억측은 삼가도록 하자.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박근혜 정권이 불안한 토대 위에서, 심지어 능력조차 부재한 상태에서 출발했었다는 점이고,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우려 무언가 시도하면 할수록 그것이 화가 되어 무언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과잉된 상태를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사실 이 말은 그녀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 모른다.

대중의 언어로 군림하기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실제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와 내가 보고자 하는 현실적 문제가 서로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지난 10년은 굉장히 골치 아픈 시간이었다. 나는 민주당 계열이 통치하는 세상을 비판하고 싶었고 그런 기대감으로 지난 수년 동안 공부를 해왔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보수여당이 집권했고, 그 바람에 내가 가진 화살은 의도치 않게 무용지물 꼴이 돼버렸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 뉴스를 접했을 때 말 못할 상념이 있었다면 그런 것이었다. 우리들 모두가 5년 동안 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하기에 한숨이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더 고단해지겠다는 생각도 섞여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글 쓰는 직업을 선택했지만, 막상 이 바닥도 만만치 않아서 글쓰기의 표적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게 됐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박근혜의 화법을 비평한다는 건 무척이나 고루한 일이다. 새로운 또는 새로워야 할 시대에 낡은 인물의 말꼬리를 잡아야 한다는 건 서글플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무공을 연마한 검객이 막상 하산했더니 일거리라곤 고기 써는 일밖에 없다고 쳐보자. 자기의 칼을 떨칠 기회가 없어서 슬픈 건 물론이다. 하지만 가장 슬픈 건 그런 세월을 보내다보면 나중에는 그 모든 게 희미해진다는 데 있다. 들고 있던 검은 무뎌질 대로 무뎌지고 몸도 굼뜨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헷갈리고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산에서 내려왔던 거지. 내가 닦았던 검술이 쓸모는 있을까. 나중에 진짜 적들의 세상이 오면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 아니, 세상이 바뀌긴 하는 걸까. 표적을 두 개나 가져야만 글쟁이는 제 운명이 버겁다.

물론, 시절이 시절인지라 우리는 애석하게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버릴 수가 없다. 누구 말마따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이른바 민주 세력이 내뱉는 허울 좋은 거짓말들만 상대하는 속 편한 입장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바라는 바가 무엇이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가장 골칫거리는 어쨌든 반민주 세력이니 말이다.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라는 말은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원래 이 말은 민주화-개혁 세력이 대한민국을 향해 호소할 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만연한 부정부패, 뿌리 깊은 정경유착, 고리타분한 관료주의, 각자도생의 경쟁사회, 전관예우를 비롯한 각종 관행들에 이르기까지, 정치 성향을 따지지 않더라도 누구나가 가졌을 법한 문제의식들이다. 대한민국이 원리원칙이 아니라 각종 비정상적인 것들에 의해 운용되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엔 '이민'이나 '붕괴' 밖에 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

이런 문제의식에서 개혁 세력은 낡은 정치를 대체하겠노라며 선거에 임하곤 했다. 확실히 박근혜 진영은 반대 세력의 언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발휘했다. 그리고 항상 반 발짝 더 빨랐다.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등장했던 것, 4대 폭력을 근절하겠다며 집권 초기의 분위기를 잡은 것, 지하경제 양성화니 뭐니 하면서 실체 모연한 창조경제를 띄운 것, 그리고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던 구호로서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 대다수 언술들이 거짓말이나 깜짝쇼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됐지만 어쨌든 효과를 톡톡히 봤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4.16가족협의회 회원이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우리는 경제민주화가 경제활성화로 바뀌었다는 것, 4대 폭력보다 더 심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었다는 것, 창조경제가 말 그대로 창조적 가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정말 비정상적인 것은 현 정부였다는 것 등등을 절대 놓쳐선 안 된다. 그러나 공약이 거짓말인 걸 깨닫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건 이론적으로는 쉽게 풀리는 문제다. 약속을 한 사람이 안 지킨 것이고, 그가 거짓말쟁이였으므로, 다시는 속지 않으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약이 헛공약이었다는 사실 이전에,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세력이 같은 공약을 내걸었던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주지하듯 둘 사이에 온도 차이가 엄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태를 접했을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정치적 태도를 요구 받게 된다. 속고 안 속고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면 그 이후의 정치는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말실수가 지배세력의 무능함과 악덕을 반증해주는 미덕을 가진 것이었다면, 그녀의 집권 과정과 언술들은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가 한 군데에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 같은 담론들 가지고는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안녕이 보증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제스처로나마 정상화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건 그 요구가 그만큼 위험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오히려 다른 관점에선 그런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더 안정적인 지배를 꾀할 수 있는 길이었던 게 아닐까. 요컨대, 박근혜 화법을 통해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허상에 불과했으며 둘은 사실상 같은 몸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발견될 수는 없는 걸까.

나아가 대통령 박근혜가 다른 화법도 아니고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의 화법으로 줄곧 말해오고 있다는 게 꽤나 의미 있는 지점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특히나 지지자들에겐 더더욱 말이다. 스타강사처럼 수려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대중의 언어로 말한다. 보통의 우리들처럼 문장을 종결짓지 못하고 중언부언하지만, 때로는 신비스러운 힘에 기대면 희망이 생긴다고 주저 없이 말하기도 한다. 우리들 대다수가 사주팔자로 길흉화복을 점치고 혈액형으로 상대방의 성격을 파악하고 트렌드 분석서로 미래를 엿보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단순히 인기 영합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실제로는 거짓말이거나 언변의 모자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어떤 '대단한' 정치적 노림수로 발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라는 게 단순한 참-거짓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배적 이데올로기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서 따로 나온 게 아니라 사실은 피지배자의 보편적 정서와 사고방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때가 되면 박근혜 화법에 귀 기울여지는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실수를 가지고 조롱하고 비웃는 것만으로 정치적 스탠스를 취했다고 자기 상상하는 대중적 관행에 대해서도 우려가 되곤 한다. 지금 대목에서 중요한 건 박근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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