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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률의 삿포로 레터]'나쁜 손과 기억' 中, 소치의 심석희를 잊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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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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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소치' 심석희가 2014 소치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결승에서 중국에 막판 대역전극을 완성하며 금메달을 확정한 뒤 주먹을 불끈 쥔 모습.(자료사진=대한체육회)

 

삿포로아시안게임 한국 쇼트트랙 여자팀 주장 심석희(20 · 한체대)는 좀 느립니다. 성격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떤 질문에도 시원하게 답이 나오는 경우가 드뭅니다. 170cm가 훌쩍 넘는 키 때문인지 행동도 좀 느려 보인다고 할까요?

이는 본인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4년 전 인터뷰에서 "키가 커서 순발력이 좀 부족하고 빠릿빠릿하게 잘 못하고 발도 좀 느리다"던 어눌한 말투가 그동안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더 강한 면모를 보였던 심석희였습니다.

느리지만 일단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뜨겁게 타오릅니다. 늦게 붙은 불이 무섭고 오래간다고 한번 불타오르면 용광로가 됩니다. 평소 무던하던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엄청나게 무섭게 변하는 경우라고 할까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이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심석희는 당시 1500m에서 중국 저우양에게 아쉽게 금메달을 내준 뒤 이를 악물었습니다. 계주 3000m에서 심석희는 마지막 주자로 나서 폭발적인 스퍼트로 반 바퀴를 남기고 중국 리젠러우를 제치면서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소치올림픽에서 가장 극적인 금메달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심석희가 이번 대회에서 활활 타오르게 만들 일들이 잇따라 벌어졌습니다. 20일 주종목인 1500m에서 1년 후배 최민정(19 · 성남시청)이 금메달을 가져간 것이 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1위를 달리던 심석희는 막판 역주를 펼친 최민정에 역전을 허용했습니다. 그래도 팀 동료가 따낸 금메달이라 심석희는 아쉬웠지만 팀 주장으로서 기꺼운 마음으로 최민정을 토닥이며 격려했습니다.

심석희(왼쪽부터)와 최민정, 궈이한(중국)이 20일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1500m 시상대에 오른 모습.(자료사진=대한체육회)

 

그러나 심석희의 투쟁심에 불이 붙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심석희는 1500m 경기가 끝나고 남은 종목에 대해 "매 경기 독기를 품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결과 약점으로 지적되던 단거리 500m에서의 선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심석희는 최민정이 중국 선수들의 견제로 무산된 결승에서 2위로 달리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1위로 올라서 금메달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판커신의 손버릇은 여전했습니다. 2014 소치올림픽 1000m에서 앞서가던 박승희(스포츠토토)를 잡아채려 했던 판커신은 마지막 코너에서 앞서가던 심석희 무릎을 잡아채는 황당한 파울을 범했습니다. 심석희가 주춤한 사이 3위로 처져 있던 장이저(중국)가 어부지리로 1위로 골인했습니다.

심석희는 '나쁜 손'의 희생양이 된 것도 모자라 추월 과정에서 판커신을 밀었다는 판정에 실격까지 당했습니다. 꼴찌로 들어온 일본의 이토 아유코가 역시 어부지리로 은메달을 얻게 돼 홈 이점의 희생양이 된 모양새마저 펼쳐졌습니다.

중국은 20일 남녀 1500m에서 모두 한국의 작전에 말렸습니다. 여자부에서는 심석희의 노련한 견제 속에 최민정의 강력한 질주로 금메달을 놓쳤고, 특히 남자부에서는 3명이나 결승에 나서 2명의 한국보다 많았지만 이정수(고양시청)를 견제하느라 박세영(화성시청)을 놓쳐 역시 금메달까지 내줬습니다. 중국은 강세 종목인 500m에서는 더 이상 뺏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판커신이 노골적인 파울로 자폭까지 하면서 금메달을 가져간 셈입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2014 소치올림픽 1000m 결승 당시 중국 판커신(왼쪽)이 박승희를 잡아채려는 모습.(사진=중계 화면 캡처)

 

어쩌면 중국의 도발은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심석희의 승부욕에 기름을 들이부은 건지도 모릅니다. 심석희는 일단 "(판커신의 견제를) 대비하고 탔지만 피하지 못한 내 자신에 부족함을 느낀다"면서도 "남은 경기에 더 집중을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결국 승부는 쇼트트랙 종목의 마지막 날인 22일 갈립니다. 이날 남녀 1000m와 계주가 펼쳐집니다. 한국과 중국의 금메달은 21일까지 2-2로 맞서 있습니다. 500m에서 집중 견제로 결승행이 좌절된 최민정도 "계주만큼은 꼭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3년 전 소치올림픽에서 심석희는 막판 빛의 질주로 금메달을 노리던 중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예의 반칙으로 실격을 당했지만 어쨌든 쇼트트랙 최강을 확인하는 환상의 레이스였습니다. 2014년 소치의 영웅, 심석희가 3년 뒤인 삿포로에서도 분노의 역주로 '반칙왕' 중국을 응징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분노의 역주' 심석희(139번)가 2014 소치올림픽 여자 계주 3000m에서 막판 대역전극으로 중국을 따돌리는 모습.(자료사진=대한체육회)

 

p.s-2014년 소치올림픽 당시 심석희의 대역전 드라마에 고무된 가운데 썼던 '소치 레터' 기사의 제목은 '17살 여고생? 석희야, 넌 이미 영웅이야'였습니다. "스타보다 영웅이 되고 싶다"던 소원을 이룬 여고생 심석희는 물론 독자들에게 띄운 편지 기사였습니다.

삿포로아시안게임에서도 무대는 마련됐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니라 룰을 어기면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메달에만 집착하는 중국의 비매너. 3년이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다시금 시원한 제목의 레터를 띄웠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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