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지난 8일 뉴욕타임스가 유출된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 내용을 보도한 이후 미국이 우리 대통령실 고위관계자에 대해 도·감청했다는 의혹이 나왔고 언론과 야당은 정부의 대응에 대해 공격을 퍼붓고 있다. 보도가 나온 다음 날 대통령실 관계자는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하면서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번 보겠다"고 덧붙였다.
그 후에는 "문서 내용이 위조되었다는데 한미 간 의견일치를 보았다" "미국이 악의로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 대통령실은 이 문제가 불거져 윤 대통령의 방미와 관련하여 난처한 상황이 될 것을 우려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논란이 가라앉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어 보인다.
우선 대통령실은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라는 의식이 부족해 보인다. '미측과 협의'하고 '과거 및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여 대응하겠다'는 것은 맥빠지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미측과 '협의'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고위관계자의 머릿속에는 미국에 '항의'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어휘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용산 대통령실.
이런 경우 첫 반응은 '사실 확인 후 검토하여 미측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 정도는 되어야 한다. '미측과 협의' 한다는 말은 국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정부에 부담 요인이 될 것이다. 대외적으로 말을 할 때 정부에 부담 요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는 것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의 하나이다. 이처럼 큰일이 터지면 대통령실의 참모들이 한데 모여 토씨 하나까지 고민하여 대통령실이 발표할 입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한 과정이 있었는지, 과정은 있었는데 능력이 안 되어 저 정도 말밖에 못 한 것인지 궁금하다.
대통령실은 또한 도·감청 의혹에 대해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말은 항의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이 할 말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도청 자체가 문제인데 도·감청이 선의냐 악의냐를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통령실이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주객전도의 말을 하고 말았다.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연합뉴스나아가 문서 내용이 사실이 아니고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폈는데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과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기밀문서의 무단 유출을 인정하였으니 미국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리고 미국의 도·감청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부유출자가 있다는 것인데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 쪽에서 누가 미국 측에 정보를 흘렸는지 반드시 색출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은 오랜 기간 적대국은 물론 우방국에 대해서도 도·감청을 해왔음이 주지의 사실인데 이번 일을 갖고 난리법석을 떨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도 있다. 그러한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처음부터 공식 항의와 재발 방지 요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대응이다. 현재까지 미국의 반응은 국가 안보를 위해 정보 수집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측이 비굴하게 나오지 않았더라면 '동맹국들의 우려에 유의하겠다'는 정도의 말이라도 덧붙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번 유출과 관련하여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문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였을 뿐이고 도·감청 여부에 대해서는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으니 한국이 특별히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프랑스와 이스라엘 관련 내용은 유출된 문서에 비추어 볼 때 도·감청에 의한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와 이스라엘 정부가 그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최종 조율을 위해 1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연합뉴스대통령실은 임박한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위한 분위기가 저해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고 이번 의혹이 한미 관계에 갖는 의미 그리고 건전한 한미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없어 보인다. 윤 대통령 정부는 대외정책에서 굳건한 한미 관계를 우선시하고 있는데 그러려면 우리 사회의 다수가 미국에 대해 긍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대통령실 참모들의 소위 정무적 감각이 매우 부족하여 우리 사회에 반미정서를 부추기는 소재를 제공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돌이켜 보면 한국 정부는 강대국에 대해 뭔가 반드시 문제를 제기해야 할 상황이 있을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강대국을 상대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최소한의 존중이라도 받으려면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생기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아가 제3국은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중국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자세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윤 대통령 정부는 대미 관계에 임함에 있어 이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