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서울 염창동 맨홀에서 작업자 한 명이 내부로 휩쓸려 가는 사고가 발생, 관계자들이 현장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달 25일 맨홀 내부 보수를 하다 불어난 물에 휩쓸려 40대 작업자가 숨졌다. 현장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방안이 빼곡히 적혀 있어야 할 공사 안전계획서에는 폭우로 인한 사고를 예방·대피할 지침 등은 없었다. 한마디로 안전하지 않은 '안전관리계획서'였다.
공사의 발주처인 구청의 부실한 관리감독도 도마 위에 오를 전망이다. 공사마다 이 같이 허술한 안전관리계획서를 보고받고도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지자체가 보다 전문적으로 안전계획을 검토하고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매뉴얼에는 있는데, 안전관리계획에는 없다
지난달 25일 서울 강서구 등촌역 인근에서 맨홀 보수 공사를 하던 A(46)씨가 맨홀 내부로 휩쓸려 약 1㎞ 떨어진 가양빗물펌프장 인근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가 끝내 숨졌다. 폭우로 인해 맨홀 내부에 급류가 들이닥치면서 A씨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해당 공사는 강서구청이 발주해 J건설업체에 시공을 맡긴 '등촌동 사각형거 보수공사'다. 그런데 CBS노컷뉴스가 강서구의회 김민석 의원을 통해 확보한 J건설의 '안전관리계획'과 '안전관리계획서'에는 폭우 상황 등을 대비한 안전 지침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모두 J건설이 착공에 들어가기 전 강서구청에 제출한 자료다.
비가 오면 도심 위로 쏟아지는 빗물이 배수관을 타고 강이나 바다, 하수처리장 등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맨홀 아래 상하수도에는 물이 급격히 불어난다. 관련 안전 조치 사항은 필수적인데도 정작 노동자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안전관리계획과 안전관리계획서에는 관련 내용이 빠진 것이다.
서울시 '돌발강우 시 하수관로 내부 안전작업 관리 매뉴얼'에 따르면, 안전사고 예방·대응 대책은 △사전 안전교육 실시 △안전작업 조치사항 이행 △안전사고 발생 시 대응으로 나뉜다. 이 중 사전 안전교육 내용에는 돌발 강우 시 연락 방법과 대피 요령, 재해자 구조와 응급처치 방법 등이 포함됐다.
또 안전작업 조치사항에는 맨홀 사다리와 구명 밧줄 등 대피시설을 설치하고, 안전관리원은 작업자와 무전으로 30분 간격으로 교신하라는 등 구체적인 요령이 적혀 있다. 특히 작업 도중 강수확률이 50% 이상이거나 육안으로 하늘에 먹구름이 확인되면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사항도 명시됐다.
J건설이 제출한 안전관리계획서에는 산소·유해가스 농도 측정 등 밀폐공간 작업에 대한 안전 조치 등도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았다. 서울시 '밀폐공간 작업 안전관리 매뉴얼'에 따르면 맨홀 등 밀폐공간에서 작업을 할 때는 산소·유해가스 측정기와 환기팬, 송기 마스크 등을 준비해야 한다. 또 밀폐공간 작업을 시작하기 전 산소와 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해야 한다.
연합뉴스반면 J건설의 안전관리계획서에는 '안전모, 안전화 착용을 철저히 지도감독', '수시 안전교육을 통해 노무자 스스로 재해예방에 힘쓰게 한다' 등 원론적인 내용만 담겼다. 매일 안전점검을 하겠다고 명시한 계획들도 △안전장치 점검 △보호구 착용 상태 △유해·위험요소 확인 등 추상적인 내용들이었다. 사후 대처와 관련해서는 '산업재해 발생 위험이 있을 때 작업을 중단하고 작업자들을 대피시키라'는 내용만 있을 뿐, 비가 오거나 가스 농도가 달라지는 상황에 대한 지침은 없었다.
안전관리계획에 방독 마스크, 송기 마스크, 기타 노동부장관이 정하는 보호구 등을 점검하고 착용을 의무화하라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가스, 산소결핍, 공기 등에 의한 건강장애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라는 추상적인 지침에 뒤따르는 것이다. 산소·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하라는 등 구체적인 지침은 없었다.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단 최명기 교수는 "안전관리계획서는 건설기술진흥법에 따라 제출하게 돼 있다. 공사를 할 때 인근 보행자들의 안전과 시설로 인한 안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등이 주로 담겨야 한다"며 "그런데 (J건설이 강서구청에 제출한) 안전계획서를 보면 작업자 안전에 대한 내용이 들어갔는데 내용이 틀리고 검토도 허술했다고 보인다"고 분석했다.
부실한 안전계획 방치한 구청
강서구청이 지난 5월 9일 게시한 해당 공사 입찰공고의 일반시방서를 보면, '집중호우 등 천재에 대하여는 평소부터 기상예보 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항상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하여 두어야 한다'고 명시한 부분이 있다.
J건설이 구청에 제출한 '사각형거 보수공사 시공계획서' 중 '최초 위험성 평가서'에도 '작업 중 우천이나 호우 발생 시 고립이나 익사 사고'가 가장 위험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J건설도, 강서구청도 우천 시 맨홀 작업이 위험하다는 것을 사전에 인지한 정황이다.
건설기술진흥법 제62조에 따라 시공사는 착공 전에 안전관리계획을 세워 발주자에게 제출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지난달 25일 40대 작업자가 사망한 맨홀 공사의 발주처는 강서구청이다. 업체가 안전관리계획을 작성하면 감리자가 검토하고 발주자인 구청은 이를 검토하고 승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강서구청이 우천 시 맨홀 작업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정작 J건설의 부실한 안전관리계획서에 대해서는 방치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다.
진교훈 강서구청장은 지난27일 맨홀 사고와 관련해 "제기되는 여러 의혹에 대해 객관적이고 투명한 검증이 필요하다"면서 특별 감사를 지시했다.
강서구청 측은 "안전관리계획서를 검토하는 기준은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 수사중이므로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각 구청에 건축안전센터가 있지만 (이는) 건축물에 대한 안전이고 작업자에 대한 안전은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공무원 개인의 역량에 맡기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안전관리계획서나 작업자에 대한 안전을 전문 집단에서 검토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