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0일 서울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린 '가칭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협약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공지난 2021년 삼성가 유족이 고(故) 이건희 회장(1942~2020)과 홍라희 여사가 평생 모아온 미술품 2만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에서부터 세계적인 거장 피카소의 도자기 112점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장욱진의 '소녀/나룻배' 등 한국 근대 미술 대표작가들의 작품 및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작가들의 미술품과 드로잉 등 근대 미술품 1,600여점과 모네, 미로, 달리 등의 해외 거장의 미술품이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됐다.
이중섭, '흰소', 1953_54, 30.7x41.6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이 회장 생전에 그를 자주 만났던 이우환 화백은 2021년 문예지 '현대문학' 3월호에 '거인이 있었다'는 제목으로 이 회장을 추모하며 "내게 이건희 회장은 사업가라기보다 어딘가 투철한 철인(哲人)이나 광기를 품은 예술가로 생각되었다"고 썼다.
실제로 한 기자가 이 회장에게 그렇게 열심히 미술품을 모으는 이유를 물었을 때 이 회장은 "우선은 내가 좋아서, 홀려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열린 최대 아트페어인 프리즈와 키아프 서울에 관람객들이 몰리면서 미술품을 모으는 사람, '아트 컬렉터(Art Collector)'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회장 같은 재벌 총수나 기업가 같은 부자들이나 미술품을 사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이은주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가 최근 펴낸 '아트 컬렉터스(중앙북스)'는 여기에 물음을 던진다.
저자는 미술품 컬렉션은 '돈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라며 '좋아서, 혹은 홀려서'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작품을 모으는지, 어떤 작품에 매료됐는지를 묻고 그 답을 소개한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아트 컬렉터스 17명을 직접 만나 그들의 수집 철학과 예술 세계를 풀어냈다.
거실 중앙에 백남준의 설치 작품을 두고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패션 디자이너, 병원의 진료실과 복도 곳곳을 미술품으로 꾸민 성형외과 원장, 터미널 공간을 문화예술로 채운 기업 경영자, 컬렉션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재단 이사장,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는 젊은 MZ세대 부부 컬렉터까지, 예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컬렉터들의 다채로운 일상과 철학이 펼쳐진다.
이은주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의 '아트 컬렉터스'. 중앙북스 제공"그 터미널을 헐고 현재의 DTC가 자리하기 전까지 대전 시내 이 주변에는 이렇다 할 문화시설이 없었어요. 이곳 터미널을 단순히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곳이 아니라 재미와 감동,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대전시 동구의 대전복합터미널(DTC·Daejeon Termnial City)을 세계적 예술작품을 품은 복합공간으로 만든 이영민 대전복합터미널 부회장의 말이다.
DTC 아트센터는 2013년 개관 전시 이래 지난 10년동안 초대전과 그룹전을 통해 다양한 작가를 소개해왔다. 그동안 이곳에서 열린 전시는 모두 50여 회, 참여 작가 수만 300여 명에 달한다.
배우자인 이만희 대전복합터미널 회장 집무실 입구의 접견 공간과 임원실 인근의 라운지에는 김환기, 김창열, 박서보, 임동식, 강요배, 전뢰진 등 국내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이 책에는 이 부회장 집무실에 놓여있는 한국 조각계의 거장 고정수 작가의 조각과 권영우의 회화, 엘리엇 헌들리의 드로잉을 볼 수 있다.
이만희 대전복합터미널 회장 집무실에 전시된 이건용 화백의 작품과 권대섭, 이종수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도 볼 수 있다.
"다 같이 사는 세상이잖아요. 이만큼 축복받고 잘 살았으면 사회를 위해서 일을 해야죠. 예술을 후원하고, 공유하는 일도 저 같은 사람한테는 사회적 의무라고 생각해요."
컬렉터를 넘어서 문화예술 전 분야에서 후원자로 활발히 활동해 온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의 말이다.
김 회장은 "작품을 수집하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예산에 맞게 구입하는 것"이라며 "절대 무리해서 사지 말아야 한다. 빚내서 작품을 사는 건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는 "선진국에 기부가 활성화된 것은 바로 세제 혜택과 같은 기부 유치를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보세요. 당장 이건희 회장 컬렉션도 그렇게 안됐잖아요. 그 엄청난 컬렉션인데도 말이에요. 우리나라 소프트웨어도 시대에 맞게 변해 나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 책에는 프랑스 추상화가 조르쥬 마티유와 한운성 화백의 작품,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브리짓 코완즈, 최은서 작가, 이른바 '마망'이라 불리는 거미 조각으로 유명한 루이즈 브루주아 등 김 회장 컬렉션의 주요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투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을 가까이에 두고 보는 마음으로 해야지요.
'끌림' 없이 트랜드 따라 구매하는 것도 절대 금물입니다."자신의 컬렉션을 가리켜 "내 열정이고 기쁨이고 생활이다. 삶의 전부라고 할 순 없지만 정말 중요한 일부"라고 말하는, 수집 경력 40년에 달하는 미술 애호가로 호텔을 통해 아트 경영을 실천해온 이상준 더프리마 회장의 조언도 담겨 있다.
저자는 "각 수집가는 직업도, 관심의 초점도 다르지만, 예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열렬한 탐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공부하지 않는 컬렉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며 "'돈보다 열정'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고 강조한다.
특히 저자는 "'이건희 컬렉션'은 그 방대한 규모와 더불어 '국가 대표급' 퀄리티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며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한 개인의 아트 컬렉션이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고 강조했다.
올컬러로 제작된 책으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가 찍은 사진을 통해 어디서도 보기 힘든 아트 컬렉터들의 수장고, 갤러리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