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이 물든 종묘 전경. 권유빈 인턴기자서울 종묘 인근 세운4구역에 최고 142m, 35층에 달하는 초고층 건물이 들어설 수 있게 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종묘 경관과 문화유산 가치를 이유로 인근 개발이 엄격히 제한됐지만, 최근 서울시의회가 지난해 관련 규제 조례를 완화했고, 이에 국가유산청(전 문화재청)이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조례 개정이 협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오랜 기간 재개발을 기다리던 일부 주민들과 도심 활성화를 강조하는 서울시,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1호' 종묘의 경관 보존을 외치는 문화계·학계의 강한 반대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종묘는 500여 년 넘게 이어온 제례 전통과 조선 왕실 종묘제례악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유네스코는 등재 당시 '세계유산 구역 내 경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에서의 고층 건물 인허가는 없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이에 이곳 경관에 높이 142m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세워지는 사례가 현실화될 경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탈락하거나 '위험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종묘 앞 초고층 빌딩 건설'에 대해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CBS 노컷뉴스 인턴기자가 지난 7일과 8일 종묘 일대에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관람객이 "이미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인근 건물이 걸린다"며 불만을 호소하고 있다. 권유빈 인턴기자"고층 건물 들어서면 경관 영향 불가피"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부분 부정적 입장이었다. 가장 많이 나온 말은 '풍경과 미관'에 대한 우려였다. 유병욱(76) 씨는 종묘에서 찍은 스마트폰 사진을 꺼내며 "지금도 사진 찍으면 이렇게 뒤에 건물이 걸리는 경우가 있다. 일부러 그 건물이 보이지 않게 각도를 조정해서 사진을 찍는다. 이 정도도 보기 안 좋은데, 140미터짜리가 생기면 더는 여길 안 올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함께 있던 김상렬(75) 씨도 "종묘는 산과 고궁이 어우러지는 맛이 있는데, 그게 다 가려지면 뭐하러 오나"라고 덧붙였다.
가을이면 종묘를 꼭 찾는다는 이정민(25) 씨는 "이곳은 주변이 너무 발달되지 않아서 더 특별하다"며 "그 분위기가 무너지면, 관람객 입장에서도 문화재 가치가 확연히 떨어질 것"이라 했다. 이정원(68) 씨도 "서울 대부분이 개발돼버렸는데 종묘만큼은 유일하게 옛 느낌이 남아있다"며 "이젠 그런 공간 하나 없는 도시가 될까봐 씁쓸하다"고 말했다.
가을 단풍을 즐기기 위해 종묘를 찾은 시민들. 권유빈 인턴기자 "보존 가치 높은 공간, 개발 위치 적절하지 않아"
건물로 인해 세계유산 자격을 잃을 수 있다는 점도 시민들이 크게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송재분(75) 씨는 "종묘는 그냥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나라의 정체성이 담긴 상징 같은 곳이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며 "우리가 이걸 지키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35년 만에 한국을 찾은 김모(66)·박모(66) 씨는 "서울이 이렇게까지 변했나 싶었다"며 "문화유산이면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지, 앞에 빌딩을 세운다는 건 이해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또 개발 장소 선택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모(63) 씨는 "서울에 개발할 데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종묘 앞이냐"며 "당장의 수익보다 백 년, 천 년 갈 걸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승연(53) 씨도 "서울에 개발이 필요한 건 맞지만 이 풍경을 보고 느끼러 오는 건데, 그런 차별성이 사라지면 여길 찾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가을 산세와 조화를 이룬 종묘 전경. 권유빈 인턴기자"무조건 반대보다, 조화로운 개발 고민해야"
다만 일부 시민이 종묘의 경관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개발이 필요하다고 했다. 근처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강모(67) 씨는 "나라에서 승인한 거라면 뭔가 이유는 있을 거라고 본다"며 "가리지만 않으면 괜찮다. 조화롭게 지어야지 무조건 반대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상길(54) 씨는 "이 동네가 한참 동안 개발을 기다려온 것도 사실"이라며 "협의를 잘하면 상권도 살아날 수 있지 않겠나"고 했다.
건물의 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엄성룡(60) 씨는 "종묘는 한 나라의 기억이 고스란히 쌓인 곳인데, 그 앞에 무엇을 세우느냐는 결국 우리가 뭘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며 "무조건 개발을 막자는 게 아니라, 서순라길처럼 낮고 조화롭게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개발하는 해법은 없느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