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보험금'도 못 갚아줄 빚…'이희진 피해자' 부서진 10년

[사기, 뒤바뀐 정의③]
'청담동 주식부자' 또다시 500억 상당 재산 쌓을 동안
10년 전 주식 사기 피해자들 '피눈물'…죽음까지 생각
코인 피해자도 '울상'이지만 '피해 회복'은 또다시 재판해야

편집자 주

'청담동 주식부자'로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지금도 서울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에 산다. 10년 전 사기죄로 3년 6개월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이희진씨의 재력은 여전히 건재한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 그에게 주식 사기를 당했던 피해자들, 코인 사기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너진 삶을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다. 지연된 정의, 아니 어쩌면 뒤바뀐 정의를 매 순간 목도하는 사회. 지난해 사기 사건이 역대 최고치에 달한 이유가 아닐까.

박중혁(가명)씨가 기자들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박중혁(가명)씨가 기자들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 글 싣는 순서
①[단독]'청담동 주식부자' 사기 재판 중 "골퍼됐다"…초호화 생활
②[단독]'검찰총장'에서 이희진 '방패'로…불안한 法심판대
③'사망보험금'도 못 갚아줄 빚…'이희진 피해자' 부서진 10년
(계속)
오전 9시, 모두가 출근을 위해 서두르지만 박중혁(가명)씨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온다. 박씨는 전날 오후 5시부터 장장 15시간의 경비 근무를 마쳤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끼니를 때우고 집안일을 하고 나면, 해가 머리 위에 올라선 오전 11시쯤 잠자리에 눕는다.
야간 근무의 피로함을 고려해 직장에서는 박씨를 격일로 출근시킨다. 하지만 눈을 붙인 시간도 잠시, 박씨는 4시간 만인 오후 3시쯤 일어나 다시 출근할 준비를 한다. 경비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공장에 나가 일용직 근무를 한다.

'죽음으로 갚는다' 생각까지…피눈물 흘리는 피해자들

30대 남성 박씨는 지난 2015년, '청담동 주식부자'로 불리는 이희진씨에게 사기 피해를 봤다. 그가 투자한 돈은 원금만 10억, 그중 온전한 그의 돈은 4억뿐이다. 부모님, 처갓집, 집 담보 대출 등으로 이른바 '영끌'해 온 대출금 6억 원은 물론, 대부분의 투자금을 몽땅 잃었다.
"모든 게 무너졌죠." 사기 피해를 겪은 뒤 A씨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개인사업도 그만두며 변변한 직장도 없었던 그는 하루아침에 매월 350만 원의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됐다. 이자만 해도 벅찬데, 원금을 조금이라도 갚지 못하면 이 이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했다. 낮에는 이씨를 상대로 건 소송 절차를 밟느라 일에 매진할 수 없었다. 야간에 일할 수 있는 마트, 경비업, 공장 등을 전전했다. 원래 가정주부였던 아내도 대출 때문에 맞벌이를 시작했다. 하루하루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돈이 없는데 애를 어떻게 키우냐"는 아내의 말처럼, 자녀 계획도 모두 사라졌다.
엎친 데 덮친 격, 소송에서도 패소했다. 이씨로부터 어느 정도 돈을 돌려받으면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도 품었지만, 물거품이 됐다.
박중혁(가명)씨가 일용직으로 일하는 공장. 박중혁(가명)씨 제공박중혁(가명)씨가 일용직으로 일하는 공장. 박중혁(가명)씨 제공
도저히 줄지 않는 원금과 이자에, 그의 머릿속엔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스몄다. '자살해서 갚아야겠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게 아니었다. 큰돈을 한 번에 마련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찾은 것이다.
사망보험에 대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알아봤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그가 죽더라도 받을 수 있는 돈은 원금과 이자를 갚기엔 한참 부족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서 조금씩 갚아나가는 방법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지금, 그가 갚을 원금은 8천만 원으로 줄었다. 하루하루 성실히 버텨낸 결과다.
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10년의 채무자 생활은 그에게 수면장애와 어깨근막 파열이라는 병도 가져다줬다. 의사는 어깨 수술을 권했지만, 2주간 쉬어야 한다는 말에 단박에 거절했다. 현재 그는 통증으로 쉬이 올라가지 않는 오른팔을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한다.
또 그는 가정도 잃었다. 10년 전에는 버팀목이 돼 줬던 아내도, 이제는 그의 곁을 떠났다. 박씨는 "바쁜 생활로 대화가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아내가 떠난 것 같다"며 한탄했다. 친구도 떠나갔다.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잘못을 질책하던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친구들의 냉담한 반응을 겪었을 때를 '가장 슬펐던 순간' 중 하나로 꼽았다.
박중혁(가명)씨가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공장(왼쪽)과 작업복을 입은 박씨(오른쪽). 박중혁(가명)씨 제공박중혁(가명)씨가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공장(왼쪽)과 작업복을 입은 박씨(오른쪽). 박중혁(가명)씨 제공

이희진 말에 속아 퇴사…그렇게 '은둔자'가 됐다

이씨의 사기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박씨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피해자인 50대 여성 최윤희(가명)씨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내 10년이 사라졌다"며 울먹였다.
최씨는 이희진씨의 권유로 직장도 그만뒀다. "어차피 몇 배가 될 돈, 전업해서 돈 벌라"는 이씨의 말만큼 최씨에게 달콤한 속삭임은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최씨의 재산 1억 5천만 원은 모두 휴지조각이 됐다. 더 이상 돈을 벌어들일 직장도 없었다. "(이씨의) 말발에 혹했던 거죠." 최씨는 지금도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전세 담보 대출금도 모두 잃은 그는 어쩔 수 없이 "곰팡이 피는 지하방"으로 이사했다. 당시 그가 잃은 것은 재산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결혼자금이 모두 사라지자, 약혼자도 그의 곁을 떠나갔다. 가장 믿었던 사람마저 떠나자, 대인기피증에 걸렸다. 10년이 넘은 지금도 그는 쉽사리 아무나 만나지 못한다.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 역시 유선으로 진행됐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건강도 금세 악화됐다. 사기 피해를 당한 지 1년여 만에 최씨는 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비를 보험금으로 충당하지도 못했다. "모두 해지해서, 보험료까지도 다 투자하라"는 이씨의 말에 곧이곧대로 모든 보험을 해지해 둔 터였다.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돈만으로 곶감 빼 먹듯이 살아가던 그는 몇 년 전 결국 한계에 부닥쳤다. 결국 그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 뇌경색을 앓는 어머니를 요양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 '897억 사기' 혐의…코인 사기 피해자들도 '암담'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씨 측의 재산들. 실거주하고 있는 서울 송파구 주상복합 아파트(좌상단), 청담동 레인에비뉴(우상단), 청담동 네이처포엠 오피스텔(좌하단), 경기도 가평 수변 별장(좌하단) 등. 가운데 사진은 이희진씨. 박인·송선교·박종민 기자'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씨 측의 재산들. 실거주하고 있는 서울 송파구 주상복합 아파트(좌상단), 청담동 레인에비뉴(우상단), 청담동 네이처포엠 오피스텔(좌하단), 경기도 가평 수변 별장(좌하단) 등. 가운데 사진은 이희진씨. 박인·송선교·박종민 기자
박씨와 최씨를 포함해 10년 전 이희진씨에 속아 주식 투자를 해 큰돈을 잃은 사람들은 230여 명. 이씨는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아 2020년 3월까지 복역했다. 벌금 100억 원과 추징금 122억 6천만 원도 완납했다.
사회에 복귀한 그는 이번에는 가상화폐(코인)에 손을 댔다. 피카코인·고머니2·트리클 등을 발행하고 운영했지만, 검찰은 사실상 '스캠코인'(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투자자를 현혹시켜 투자금을 유치하는 코인)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해당 코인들은 업비트나 코인원 등 국내 굴지의 코인거래소에서 모두 상장 폐지됐다.
이씨는 2023년 10월 사기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이 판단한 이씨의 코인 사기 피해자는 4만 명이 넘는다. 이씨가 발행한 코인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삶도 암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CBS노컷뉴스가 확보한 당시 검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자영업자 정모씨는 피카코인에 1억 3천만 원을 투자했다가 7천만 원가량을 잃었다. 주식 투자금 9천만 원을 빼서 넣었고, 친구에게서 3천만 원도 추가로 빌려 투자했다고 한다. 또 다른 피해자로 검찰이 불러 조사한 회사원 이모씨도 1600만 원을 투자했다가 정씨와 똑같은 피해를 봤다. 그가 잃은 돈은 1400만 원이다.
이씨는 검찰 조사에서 "투자자들의 생활자금을 이용하는 것은 한 사람을 넘어 한 가족의 삶에 사기를 치는 것"이라며 "사기로 인해 여러 가족의 삶이 힘들어지고, 내가 투자를 권유한 사람들에게 신뢰도 잃어버렸다"고 호소했다. 정씨도 "엄벌에 처해주기 바란다"며 "제 손해가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토로했다.

122억 추징됐지만…피해자 구제는 까마득

    
이씨에게 10년 전 크고 작은 피해를 봤던 피해자들은 대부분 투자금의 일부도 회수하지 못했다. 사실 사기 피해자들의 바람은 '처벌'보다는 '회복'이다. 조금이라도 돈을 돌려받길 원하지만 실상은 쉽지 않다.
피해자들이 일부라도 돈을 회수하는 방법은 민사소송이 거의 유일하다. 이희진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해 돈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에 피해자 37명은 이씨 측과 이씨가 종종 출연했던 A방송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지난 8월 최종 승소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1인당 평균 배상액은 약 1300만 원. 하지만 아직도 이씨 측은 이 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A방송사로부터는 1인당 약 400만 원 안팎의 배상금을 받게 됐지만, 이마저도 일부는 다시 토해내야 할 처지다. 민사소송법은 소송비용을 패소한 당사자가 부담하도록 정하지만, 예외적으로 승소한 당사자에게도 소송비용 일부를 부담하게 할 수 있게 한다. (관련 기사: [단독]'청담동 주식부자' 피해자들, 배상금 받고 다시 토해내야)

 
897억 원대 코인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씨를 상대로 돈을 돌려받는 일 역시 비슷하다. 먼저, 이씨의 사기 혐의에 대한 형사재판이 어느 정도 끝나야 한다. 그리고 민사소송을 제기해 또다시 지루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한다.
형사재판에서 몰수·추징한 돈이 피해자 회복에 쓰이도록 정해진 법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부패재산몰수법은 몰수·추징된 범죄자의 재산이 피해자에게 돌아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피해액이 명확해야 하고 검찰이 피해자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만, 그런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유명무실한 법"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설명이다. 법무법인 우리 김정철 변호사는 "검찰의 선의에 기대지 않으면, 형사재판만으로 피해자가 돈을 돌려받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누군가의 10년을, 가족을, 건강을 모두 앗아간 사기 피해액은 모두 국고로 사라졌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들은 여전히 빚을 갚고, 병을 안고, 소송 청구액을 벌며 무너진 삶을 쌓아 올리고 있다. "이 인터뷰로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박씨의 마지막 말은, 제도 앞에 무력한 한 피해자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앞서 CBS노컷뉴스가 파악한 이씨 측 재산은 5백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레인에비뉴 빌딩과 제주 서귀포 JW메리어트 레지던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네이처포엠 오피스텔, 경기 가평 북한강 수변에 있는 별장 등은 모두 이씨의 처가 측이나 이씨 운전기사가 등기임원으로 있던 법인이 소유했다. 또 이씨는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에 위치한 매매가 65~70억 상당의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고층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관련 기사: [단독]'청담동 주식부자' 사기 재판 중 "골퍼됐다"…초호화 생활)

※CBS노컷뉴스는 여러분의 제보로 함께 세상을 바꿉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0

0

© 2003 CBS M&C, 노컷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