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이미지2025년 한 해, 국내 출판계와 문화산업을 관통한 핵심 키워드는 단연 'AI'(인공지능)였다.
교보문고가 올해 1월부터 11월 말까지 출간 도서를 분석한 결과, 책 제목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 역시 'AI'였다. 제목에 AI가 포함된 도서만 224종에 달했다. 제목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본문에서 AI를 주요 주제로 다룬 책까지 포함하면 관련 도서는 2천 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불과 1년 사이, 관련 출간물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출판계 안팎에서는 이를 단순한 기술 유행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변화와 불안이 가장 먼저 반영된 결과로 보고 있다. 생성형 AI가 업무와 학습, 창작 방식까지 빠르게 바꾸는 상황에서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이 책을 통해 먼저 제기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출판에 머물지 않고 웹툰과 만화, 음악과 영상, 저작권 등 문화 콘텐츠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올해 출판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는 이른바 '딸깍 도서' 논란이었다. 생성형 AI로 원고를 작성한 뒤 최소한의 편집만 거쳐 단기간에 대량 출간하는 방식이다. 2022년 설립된 한 AI 출판사는 약 1년 동안 9천 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고, 업계 상위권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전자책 출판사 역시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1천 권이 넘는 전자책을 출간(예정작 포함)한 것으로 확인됐다. 출간 주제는 경제·재테크를 넘어 젠더, 퀴어, 장애, 이주, 계급, 자아정체성 등 사회과학 전반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출판계 내부에서는 곧바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AI가 생성한 문장을 그대로 책으로 묶어 유통할 경우 사실 오류나 편향, 저작권 시비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책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출판 현장에 던져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전문 출판사 커뮤니케이션북스가 611종에 달하는 'AI 총서'를 발간하며 밝힌 입장은 국내 출판계에서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는다.
커뮤니케이션북스는 "AI가 글을 대신 쓰는 출판이 아니라 인간 저자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AI 활용 출판'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AI 활용 자체를 부정하지 않되, 창작과 책임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선을 분명히 한 것이다.
각 분야 교수, 연구자, 산업 전문가 등 실명 저자가 일상 사회부터 다양한 산업 분야(AI 기술, 교육, 경영, 농업, 데이터, 의료, 예술 등)까지 사회 현안에 AI가 미치는 영향을 직접 집필하고, AI는 참고·검토·편집의 보조 도구로만 활용된다.

비슷한 논쟁이 해외에서는 이미 시작됐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도 확인된다.
기술 패권을 강조해온 미국과 유럽 지역의 주요 언론들이 AI 출판 문제를 '기술 혁신'보다 오히려 '신뢰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다뤄왔다는 점이다.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생성형 AI로 만든 전자책이 아마존 등 주요 플랫폼에 대량 유통되면서 독자가 인간 저작물과 AI 생성물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특히 자기계발서와 교육서, 아동 도서 분야에서 AI 생성 도서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 현상을 두고 "콘텐츠 접근성 확대와 신뢰 훼손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해외 출판계가 이 문제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AI가 책을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책이 대규모 언어모델(LLM) 학습 데이터로 흡수되는 구조에 있다. 미국과 유럽 출판계를 중심으로 'AI 출판' 자체보다 '이미 출간된 책과 텍스트가 동의 없이 AI 학습에 사용되고 있는가'가 더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
실제 대응도 이어졌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국 주요 출판사들은 최근 신간 도서에 "이 콘텐츠는 대규모 언어모델 학습에 사용될 수 없다"는 고지 문구를 삽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AI 기술 자체를 배척하기 위한 조치라기보다, 출판물이 무차별적으로 학습 데이터로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라는 평가다.
독일과 영국을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과학기술·의학 전문 출판사 스프링거 네이처(Springer Nature) 역시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저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AI를 활용할 수는 있지만, 사실 오류와 법적 책임은 저자와 출판사가 부담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다.
해외 출판계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기준이 '속도'보다 '신뢰'에 있다는 점에서 국내 출판계의 움직임에도 변화가 일 것인지 주목된다.
생성형 AI 이미지이 같은 문제의식은 올해 출간된 주요 AI 전문 서적에서도 반복된다. 이선 몰릭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는 저서 '듀얼 브레인'에서 인간 사고를 보완하는 도구로 AI를 설명하면서도, 판단과 선택의 책임은 인간에게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AI는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무엇을 묻고, 그 답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몫이라는 취지다.
아르빈드 나라야난 프린스턴대 컴퓨터과학 교수도 저서 'AI 버블이 온다'에서 생성형 AI를 둘러싼 과도한 기대가 산업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기술 발전 자체보다 이를 둘러싼 과신이 더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용성의 'AI 리터러시', 월터 시넛 암스트롱의 '도덕적인 AI' 또한 AI 활용 능력보다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인간이 검토하고 판단하며 책임지는 구조 마련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출판계의 이 고민거리는 기술 확산의 속도만큼이나 문화콘텐츠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웹툰과 만화 업계에서는 AI 기반 배경 생성과 채색 보조 기술이 실제 제작 과정에 도입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 작가들의 작품이 학습 데이터로 활용됐을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 플랫폼은 약관을 개정해 AI 학습 활용 범위를 명시하기 시작했고, 작가 단체들은 저작권 보호 방안을 놓고 공동 대응을 논의 중이다.
문학 분야에서도 AI 생성 콘텐츠와 인간 작가의 작품이 동일한 유통 채널에서 소비될 경우를 둘러싼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음악 산업에서는 AI 보컬 합성과 작곡 기술이 실제 제작 과정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영상 분야에서는 번역과 합성 기술 확산과 함께 딥페이크와 허위 정보 문제가 함께 거론된다.
서울 시내 한 서점에서 직원이 인공지능 챗 GPT가 쓴 자기계발서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정부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은 출판과 콘텐츠 전반에서 AI 활용 기준과 저작권 보호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AI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른 만큼, 당장 규제보다는 업계 자율 기준과 가이드라인 정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우세하다.
출판과 문화산업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분명하다. 콘텐츠의 제작 주체와 책임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독자, 플랫폼에서 웹툰과 영상을 소비하는 이용자들 사이에서도 "이 콘텐츠는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2025년은 AI를 둘러싼 논의가 출판을 출발점으로 문화산업 전반으로 확산된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2026년을 앞둔 지금, 출판과 콘텐츠 업계는 AI 활용의 '속도'보다 '신뢰와 책임'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라는 과제 앞에 서 있다.
텍스트(text), 책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이제 한국 문화산업 전체가 답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