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서울 영등포구 일대에 설치된 정당 현수막 모습. 황진환 기자최근 한중 관계를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정부 간 외교 현안 그 자체보다도, 민간 차원에서 확산되고 있는 혐오와 감정의 정치화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한 혐중 정서는 특정 외교·안보 이슈나 경제적 갈등을 계기로 반복적으로 증폭되며, 점차 일상적 인식의 층위에서 구조화되고 있다. 이는 단기적인 여론 악화를 넘어, 장기적으로는 외교적 선택의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고 정책의 유연성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혐중 정서는 문화·역사적 갈등, 경제적 불안, 그리고 국제 질서 변화에 대한 불확실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한국만 해당하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최근 국제 정치 전반은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는 흐름 속에 놓여 있으며, 정치 지도자들이 극성 지지층의 요구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향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에서도 마찰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중·일 관계에서 확인되듯이, 동아시아 전반에서는 국가 간 경쟁과 갈등이 민간 차원의 감정 문제로 전이되는 현상이 점차 구조화되고 있으며, 특히 중·일 관계의 경우 역사 인식과 안보 인식의 충돌 속에서 누적된 민간 감정의 악화가 관계 개선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은 동아시아 외교 지형에서 비교적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국·일본·러시아와 모두 외교적 소통 채널을 유지하고 있으며, 갈등의 당사자인 동시에 조정자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외교적 선택은 단순한 양자 관계를 넘어 역내 질서 전반에 일정한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일 경북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한중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와 관련하여 지난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한중 관계의 관리 국면 복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색 국면이 이어지던 한중 관계가 정상 외교 차원에서 다시 안정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나아가 한국 대통령이 2026년 초반에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는 더할 나위 없이 한중 관계의 새로운 물꼬를 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에는 "예는 오고 가는 데에 있다(禮尚往來)"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이어 한국 대통령의 방중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상호 존중과 신뢰 회복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실용과 균형을 중시해 온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 기조가 이러한 상호 방문을 통해 구체화된다면, 한중 관계는 이념이나 감정의 문제를 넘어 실질적 협력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정상 외교의 안정적 복원은 정부 간 관계뿐 아니라, 그동안 경색되었던 민간 차원의 상호 인식과 감정도 점진적인 개선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이빙 주한 중국대사. 연합뉴스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난 12월 5일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이 개최한 '2025–2026 한중 관계 회고와 전망' 심포지엄에서도 공유되었다. 해당 심포지엄에는 다이빙(戴兵) 주한 중국대사가 직접 참석해 의미를 더했으며, 학계와 외교·정책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 개선의 조건과 함께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확산하고 있는 혐중 정서를 어떻게 완화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 비교적 진지하고 건설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감정적 대응이나 단절론이 아니라, 제도적 공정성 회복과 일상적 교류의 복원을 통해 신뢰를 축적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정상 외교나 심포지엄 하나만으로 민간 차원의 혐오와 감정의 문제를 단기간에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의 본질은 갈등을 제거하는 데 있기보다, 갈등이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확산하는 것을 관리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부가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외교 행보를 통해 한중 관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민간 차원의 감정 악화를 완화하는 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 동아시아에 필요한 것은 경쟁을 부정하는 낙관론도, 혐오 감정에 기댄 단절론도 아니다. 오히려 경쟁을 전제로 하되 갈등을 관리하고 공존의 공간을 넓혀가는 성숙한 외교의 회복이 필요하다. 한중 관계의 안정적 관리와 민간 혐오의 완화는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이 한중 관계의 물꼬를 트고 대화의 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다면, 이는 양자 관계를 넘어 동아시아 외교 질서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경쟁과 혐오가 일상이 되어가는 시대일수록, 관계를 관리하는 외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지금 한국이 서 있는 이 지점이 향후 동아시아 외교의 방향을 가늠하는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지원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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