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국방부·국가보훈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박진경 대령 국가유공자 등록 논란'과 관련해 "제주 4.3 유족 입장에서는 매우 분개하고 있는 것 같다. 방법을 찾아보시라"면서 사실상 취소 검토를 지시했다. 연합뉴스고(故)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대통령까지 나서 취소 검토를 지시하자 정부가 관련 절차에 착수했다. 다만 이번 사안을 두고,
특정 개인에 대한 판단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 유공자 심사 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보훈부는 박 대령의 무공훈장 추서 경위와 관련 자료를 확인하는 한편 유관기관과 협의를 거쳐 후속 조치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권오을 장관은 "보훈부에서 책임지고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논란의 중심에 선 '박진경 대령'…그는 대체 누구?
1948년 5월 제주 부임 직후 박진경 9연대장의 모습. 제주4.3보고서 캡처
박 대령은 1948년 5월 제주 4·3사건 당시 조선경비대(국군 전신) 9연대장으로 부임했던 인물이다.
'제주 4·3진상조사보고서'는 '박진경 연대장의 진압작전' 항목에서 약 3페이지에 걸쳐 그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데,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유혈진압 책임자'라는 증언과 함께, '선무공작으로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양민들을 구출하려고 했다'는 등 상반된 진술을 병기했다.
보고서는 "그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뉜다"고 정리했다.이는 지역사회에서도 오랫동안 갈등의 씨앗이 되어 왔다. 예컨대 1952년 박 대령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제주시에 세워진 '박진경 추도비'를 두고도 "역사 왜곡"이라며 철거를 주장하는 쪽과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신중론을 펴는 측이 맞서 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유족 측은 노컷뉴스에 이를 언급하며 "최근 추도비가 도로변으로 옮겨지면서 훼손이 이어졌고, 보호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국가유공자 인정 절차를 신청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최근 제주시 산록도로 한울공원 인근 도로변으로 옮겨진 '박진경 추도비'(맨 오른쪽 검정 비석). 15일에는 이 옆에 박 대령의 과오를 적시한 안내판 '바로 세운 진실'(가운데)이 세워졌다. 연합뉴스추도비 지키려고 신청한 국가유공자 등록, '타당성' 논쟁 본격화
유족은 지난 10월 20일 박 대령의 을지무공훈장을 근거로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다.
을지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여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이에게 수여되는 무공훈장이다. 1948년 사망한 박 대령은 1950년 12월 30일 전군 2만2750명에게 훈장이 일괄 수여되는 과정에서 추서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전몰군경으로 인정돼 현충원에 안장되는 등 국가 예우를 받아왔다.
그러나 11월 4일 이재명 대통령 직인이 찍힌 유공자 증서가 발급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리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박 대령을 둘러싼 평가가 갈려왔던 만큼 '유공자 자격'을 두고 논쟁이 격화된 것이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이 1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국방부·국가보훈부 업무보고에서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안규백 국방부 장관. 연합뉴스국가유공자 등록까지 '두 단계' 뿐…"기계적 처리, 오히려 사회적 갈등 키워"
유족 측은 "진실에 정치가 개입하면 안되지 않느냐"면서 "역사란 치열한 학문적 검증과 논의의 대상이 계속되고 열린 자세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지금의 논란은) 편파적이다"고 주장했다.
다만 문제의 본질은 이념 갈등이 아니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에 대해서도 충분한 숙의 없이 진행되는 현행 국가유공자 심사 구조에 있다.
노컷뉴스가 정보공개청구한 결과, 서울지방보훈청이 박 대령을 무공수훈을 근거로 유공자 등록 결정을 하기까지 거친 절차는
△범죄경력 조회 △훈장 발급 사실 확인 단 2가지였다. 신청부터 등록까지 걸린 기간은 15일에 불과했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건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서울지방보훈청이 기계적으로 처리한 것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보류를 하고 검토하는 절차가 분명히 있었어야 했는데, 신중하지 못한 일처리로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웠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박 대령처럼 인지도가 있는 인물은 뒤늦게라도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지만, 과거 혼란했던 시기 서훈이 이뤄진 수많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마저도 어렵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1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국방부·국가보훈부 업무보고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실제로 1950년 당시 박 대령뿐만 아니라 전군 2만2750명에게 훈장이 수여됐는데,
이 과정이 개별 심사에 따른 것이었는지 일괄 처리였는지조차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국방부 관계자는 "그때는 지금과 달리 무공훈장 수훈 심의기록(공적 조서, 심의자료 등)을 관리해야 한다는 법령이 없었다"면서 "(개별 공적심사 또는 일괄 처리 여부를) 현재로선 알 수 없고, 박 대령 건을 포함해 관련 기록 보유 여부와 자료 등을 추가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많은 인원에 대해 세세하게 찾아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보훈을 통해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한 예우와 지원을 점차 강화하는 상황에서,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교수는
"우리 보훈제도의 맹점은 서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받지 못하고, 반대로 서훈을 받아선 안 될 사람들이 받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이라며 "한국전쟁 당시 무공훈장 중에서도 민간인 학살 가해자들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데,
제도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더 신중한 검증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