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담담히 들려주는 황호필 장로. 최화랑 기자중학교 2학년 봄, 그는 형의 부음을 들었다. 서울에서 홀로 직장생활과 공부를 병행한 큰형이 과로와 간경화로 쓰러진 것이었다. "형님 얘기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60대가 된 지금도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인터뷰 중 몇 차례,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한때 풍족했던 집안은 아버지의 잘못된 보증으로 풍비박산 났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동경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주변의 시기와 꾐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보증은 신뢰의 증표였지만, 동시에 파멸의 씨앗이기도 했다.
"형님은 내가 힘들 때마다 용기와 희망을 준 분이었어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도 가족에 대한 애착이 많습니다." 형의 죽음은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원하지 않았던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했지만, 그는 '공돌이'라는 단어가 싫어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당시 산업화 시대 한국에서 '공돌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를 낮잡아 이르는 사회적 낙인이었다.
학원비를 낼 형편이 안 되자 학원 칠판을 닦아주며 공부했다. 그 시간들 속에는 그는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터득해 갔다.
첫 직장은 동양제과(현 오리온) 공무파트 전기직이었다. "저에게 주어진 이 일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술사 공부도 병행했지만, 결혼 후 가정에 집중하기 위해 포기했다.
"제가 하지 못한 공부를 아들이 이어갔어요. 지금은 공공기관 선임 연구원이고 공학박사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함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룬 아들에 대한 뿌듯함이 배어 있었다.
만 41세, 그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월급쟁이로 봉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어요." 광전자를 퇴직하고 하영전기관리공사를 설립했다. 사업은 잘됐지만 안전사고와 직원 관리의 어려움으로 전기공사업을 접고 태양광 사업으로 전환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태양광은 아직 낯선 기술이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리고 태양광 패널 아래 빈 공간에서 이색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고사리도 심어보고 도라지도 심어보고 버섯도 재배했는데 다 실패했어요."
실패의 연속이었다. 태양광 패널 아래 그늘진 땅은 작물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삼 재배 전문가인 친구(신은식)의 도움으로 인삼에 매달리게 되었다.
직접 키운 인삼을 보고 미소 짓는 황호필 장로. 황호필 장로 제공 "퇴근 후 인삼밭으로 가서 풀도 뽑고 찬송가도 틀어주고 나도 찬송가 부르며 인삼이 어디 아픈지 확인하고 물도 주고 햇빛이 강하면 커튼으로 막아줬어요." 인삼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결과, 지금은 12년근 왕인삼까지 재배하게 되었다. "인삼한테 정을 쏟은 만큼 인삼도 나한테 줍니다. 인삼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게 풀려요. 힐링 요소입니다."
그는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한마디로 "은혜"라고 정리한다. 그리고 은혜는 붙잡아두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언제나 '나눔'이 따라다녔다.
약 35년 전, 어느 목사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다. 어려운 학생이 있는데 학비가 없어 학교를 보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당시 50만 원을 후원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1990년대, 50만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 계기로 학비가 없어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는 몇몇 아이들의 학비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됐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을 경험했지만, 항상 힘든 인생의 여정에서도 나눔을 실천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익산 폭우 수해 때는 누전된 곳을 고쳐주고 차단기를 교체하고 형광등을 LED 등으로 교체해줬다. 최근에는 김제의 한 교회 전기시설 보수공사를 무료로 해줬다. "주위에 열악한 교회들이 많아요. 기회가 되면 공사를 무료로 해드리고 있어요."
형의 이름을 딴 '호주장학회'를 만들어 차상위 계층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쿠바에는 가족 이름으로 5개 교회를 건축하고 학생들의 학비와 식사비를 지원하고 있다. 한 목사의 국민연금을 일시불로 넣어드린 적도 있다. "노후준비를 전혀 못하셨더라고요. 지금은 적지만 꾸준히 연금을 받고 계시죠."
사무실에서 쿠바 교회와 학생 후원 이야기를 전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황호필 장로. 최화랑 기자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을 비롯해 여러 표창을 받은 그는 "주님께서 언제나 늘 저와 함께 하신다"고 답했다. "제 인생의 한 순간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살 수 없었을 겁니다."
사업과 교회를 병행하며 그가 지킨 원칙은 명확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주일을 지키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장의 이익보다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주일은 꼭 지킵니다. 직장을 다닐 때도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꼭 가야 한다고 선포했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말씀을 항상 가슴속에 품고 다닌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게 진리입니다. 기뻐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나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면 곧잘 웃음을 연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웃음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는 마냥 작아지고 또 작아집니다. 때때로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울고 또 우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그 많던 웃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오늘도 업무를 보면서 또한 이동하면서 이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이동 중에도 혼자 찬송가를 부른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익산시 성당면에 위치한 태양광 발전소 전경, 그 아래에서 인삼이 자라고 있다. 최화랑 기자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배워서 날마다 낮추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오늘도 나는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는 주님만 따라가리라고 기도해 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긍휼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인삼밭을 방문했다. 태양광 패널 아래, 12년근 인삼들이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인삼처럼, 그는 가난과 상실의 그늘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