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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혐의없음' 뒤집힌 성폭력 사건…법정서 쓰러진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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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 다음날 '화이팅' 문자해"…경찰 불송치 결정
이의신청-재항고 끝에 피고인 법정에 세웠지만…
무너진 피해자의 삶…"온 몸으로 피해 말해"

연합뉴스연합뉴스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 506호 법정. 고요한 법정 앞이 갑자기 술렁였다. 경찰들과 구급대원이 다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법정 안으로 속속 들어갔다. 김정은(가명·30대)씨가 약 1년 반 전 있었던 '그날'에 대한 증언을 마친 직후였다.

당시 정은씨는 법정 안에서 증언을 마친 뒤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던 중 갑자기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에 의해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정은씨의 아버지 김기태(가명·60대)씨는 파란 담요를 덮은 딸이 실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이 사건 피고인인 박모씨는 2024년 11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부하 직원이었던 정은씨를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두 사람은 직장 내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였다.

정은씨의 시간은 1년여 전에 멈춰 있다. 정은씨가 서울고검에 제출한 항고장에 따르면 2024년 11월 22일 직상 상사였던 박모씨는 정은씨에게 술자리를 제안해 함께 술을 마신 뒤 정은씨의 주거지로 이동했다. 정은씨 측은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성관계가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사건 발생 후 재판에 이르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사건은 수사기관의 '혐의없음' 판단과, 이를 뒤집은 재수사를 거쳐 법정까지 이른 사건이다. 정은씨가 서울고검에 제출한 항고장에 따르면 사건 당일인 2024년 11월 22일, 박씨는 정은씨에게 술자리를 제안해 함께 술을 마신 뒤 정은씨의 주거지로 이동했다. 정은씨 측은 이 과정에서 강제로 성관계가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은씨는 다음 날인 11월 23일 경찰에 "어제 성폭행을 당했다. 해바라기센터에 동행해줄 수 있느냐"며 박씨를 신고했다. 고통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담담하게 피해 사실을 진술했다. 박씨가 사건 이전부터 사적인 접근을 시도하며 부적절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진술했다. "사건 발생 약 5개월 전 '주말에 뭐 하냐', '안 볼래?'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고, 답하지 않자 '사람 착각해서 보냈다'고 했다"는 취지다.

하지만 정은씨가 3개월여 만에 받은 수사기관의 답변은 '혐의 없음'이었다. 경찰은 지난해 3월 19일 "증거가 부족하다"며 박씨에 대해 불송치(혐의없음) 결정을 내렸다. 경찰은 두 사람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던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강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정은씨가 사건 직후 옷을 입고 잠을 잔 점, 다음 날 피의자에게 '파이팅'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점, 그리고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별도의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 등이 근거였다.

구체적으로 경찰은 불송치 사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피의자는 피해자와의 성관계 사실은 인정하나 강간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는 의사에 반한 강제적인 성관계였다고 주장한다. 피해자는 피해 직후인 오전에 카카오톡 메세지로 피의자에게 "화이팅"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확인된다. 피해자의 진술 외 성관계 시 강제성(폭행, 협박)을 증명할 근거가 부족하다."

피의자의 반성문과 사과 역시 쟁점이 됐다. 경찰은 이를 강간 인정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정은씨 측은 "수차례 사과문을 제출하고 합의를 시도한 점은 스스로 행위의 위법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정은씨 측은 나아가 강간죄가 인정되지 않더라도 준강간이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 다른 성범죄 성립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은씨 측은 수사기관의 판단이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간과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은씨 측은 지난해 4월 이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이의신청서에는 "대법원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 외에 다른 직접 증거가 없는 경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며 "피해자(정은씨)는 사건 초기부터 경찰 조사뿐 아니라 정신과 전문의, 상담사와의 면담에서도 주요 사실 관계에 대해 일관되고 구체적인 진술을 했다"고 적었다.

특히 경찰이 문제 삼은 사건 직후 '파이팅'이라는 문자 메시지에 대해서도 반박이 이어졌다. 정은씨 측은 "성폭력 사건에 관한 다수의 판례는 피해자가 사건 직후 명확한 판단이나 즉각적인 대응을 하기 어렵고, 특히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에 따라 대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고 했다.

이어 "피해자(정은씨)는 사건 직후인 다음 날 오전에 매우 혼란스럽고 충격에 빠진 상태에서 피의자(박씨)의 메시지를 확인했다"며 "피의자와는 직장 내 선배 혹은 상사의 관계로 향후에도 계속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검은 또 한 번 박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하지만 정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해 5월 서울고등검찰청에 항고장을 제출했고, 이 문제 제기는 받아들여졌다. 서울고검은 사건을 재검토한 끝에 재기수사를 결정했고, 검찰은 추가 수사 끝에 박씨를 재판에 넘겼다.

재판에 이르기까지의 수사 과정과 법정에서의 증언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다. 정은씨는 사건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중증 우울 증세를 겪으며 일상생활이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워 매일 택시로 출퇴근해야 했고, 결국 치료를 위해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가족들의 삶도 무너졌다. 정은씨의 모친은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딸을 간호하느라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어려워졌고, 부친인 김기태씨 역시 장기간의 스트레스로 응급실 치료를 받는 상황까지 겪었다.

김정은(가명, 30대)씨 모친이 재판부에 제출한 엄벌 탄원서. 김정은씨 측 제공김정은(가명, 30대)씨 모친이 재판부에 제출한 엄벌 탄원서. 김정은씨 측 제공
정은씨 측은 재판 과정에서 피의자가 공탁과 합의를 시도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의가 양형에 반영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정은씨의 아버지 김기태씨는 "이 사건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삶이 무너진 일"이라며 "이제라도 제대로 된 판단이 내려지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정은씨의 어머니는 박씨를 엄벌해달라는 취지로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에 이렇게 적었다.

"제 딸이 신고를 하고 울면서 '아빠 나 회사 상사한테 강간 당했어요. 지금 숨이 안 쉬어 지고, 죽을 것 같아요' 하고 연락이 왔습니다. … 피해자인 딸은 온몸으로 피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박씨에 대한 재판은 서울중앙지법 제31형사부에서 현재 진행 중이며, 다음 기일은 다음 달 16일로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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