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잡리예배당 현판 모습. 구전에 따르면 중인교회는 원중인리 마을을 '새재비'라 부르던 데서 '새재비교회'로 불렸으며, 이후 지명 변화에 따라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최화랑 기자모악산 자락,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인동. 이곳에 발을 디디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 땅이 품고 있는 오래된 신앙의 무게를.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불리는 모악산은 수백 년간 이 지역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척박한 땅이었다.
이곳에 1907년 주은숙이라는 이름만 전해지는 여인과 이름 없는 여섯 명이 사랑채에 모여 무릎을 꿇었다. 그것이 중인교회의 시작이었다. 역사는 때로 이렇게 이름 없는 이들의 기도로 시작된다.
그로부터 119년이 흐른 2026년 3월 6일, 중인교회는 예장합동 총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8호'로 지정됐다. 사적지 지정의 중심에는 1944년 일제강점기 성도들이 손수 지은 새잡리예배당이 있다. 이 건물은 지금도 현 예배당 옆에 나란히 서 있다.
중인교회 현 예배당과 새잡리예배당 전경. 새잡리예배당은 세 번째 예배당 건축 당시 건물을 통째로 굴려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최화랑 기자해방을 불과 1년 앞둔 시점이었다. 담임목사가 누구였는지조차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그 시절, 성도들은 새 예배당 건축을 결단했다. 밭을 마련하고 자재를 직접 구했다. 여인들은 새작골 꼭대기에 올라 작정 기도를 드렸고, 낮 동안 밭일을 마친 청년들은 밤마다 모악산으로 올라 소나무를 베어 내려왔다. 그렇게 세운 기둥 위에 서까래가 얹어졌다. 여자 청년들은 황토와 지푸라기를 섞어 벽을 만들고, 수수대로 지붕을 엮어 올렸다.
중인교회 제7대 담임 조무영 목사는 "이름도 남기지 않은 분들의 헌신이 교회를 세웠다"고 말한다. 새잡리예배당은 이후 세 번째 예배당을 지을 때 건물을 통째로 굴려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그 집념은 당시 성도들의 믿음을 짐작하게 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숨이 멎을 듯한 장면이 있다. 어느 비 내리는 밤, 서문교회에서 초청된 강사 최수덕 씨와 '순영'이라는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되는 분이 호야(호롱불)를 들고 교회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벼락이 호야를 직격했다. 그런데 불을 쥐고 있던 강사들의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교인 서주애 씨를 통해 전해진다. 서주애 씨는 교회를 세운 주은숙 씨의 손녀이자, 황도선 씨의 딸로 3대째 중인교회를 지켜온 인물이다.
유순덕 명예권사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이다. 유교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온 그녀는 교회를 나간다는 이유로 수십 년간 시댁의 핍박을 받았다. 어느 주일, 시댁 식구들은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방문짝에 그녀를 묶어놨다.
그런데 그녀는 그 문짝을 떼어냈다. 여자의 몸으로. 그리고 그 문짝을 등에 진 채 교회에 나타났다. 주일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장면이었다.
더 놀라운 반전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반백년 동안 갓을 쓰고 유교적 삶을 살았던 그녀의 남편이 말년에 병석에서 현 담임목사인 조무영 목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주님을 영접한 것이다. 50년의 핍박이 찬송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새잡리예배당에서 교회 역사를 설명하는 조무영 목사. 최화랑 기자중인교회의 역사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79년 교단 분열은 교회와 지역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싸우는 교회'라는 낙인은 전도의 길을 막았다. 산업화 속에 청년들이 떠나며 교회는 점차 쇠락했고, 한때 40여 명만 남은 작은 공동체로 남게 됐다.
그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1994년 전주에서 삼천중앙교회를 개척했던 조무영 목사다. IMF 여파로 재정 압박에 시달리던 그는 어려움에 처한 중인교회 소식을 접했고, 두 교회의 합병을 노회에 청원했다. 2006년, 그는 두 교회 성도 80여 명과 함께 중인교회 제7대 목사로 부임했다. 재정은 3백만 원이 전부였다.
"그때 교회 뒤편에 아파트 446세대가 들어섰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이미 계획하고 계셨던 거죠."
조무영 목사의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교회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2014년, 조무영 목사는 당회에 조심스러운 청원 하나를 올렸다. "매달 선교비 30만 원을 지출해도 되겠습니까." 교회가 받은 은혜를 나눠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30만 원을 손에 쥐고 나니 막막했다. "30만 원 갖고 선교사를 파송할 수도 없고…" 고민하던 그는 신학교 동기이자 평생 친구인 안성국 목사(온세계교회)에게 물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는 대답했다. "내가 하는 데가 있으니 같이 가보겠나?"
목적지는 필리핀이었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60여 명이 예배를 드리는 가정교회였다. 목회자는 생계를 위해 토목 일을 나간 상태였고, 홀로 자리를 지키던 사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교회를 지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교회 건축으로 이어졌다. '중인예수사랑의교회'를 시작으로 사역은 확장돼 현재 다섯 번째 교회 건축이 진행 중이다.
필리핀 교회 건축 등 교회 선교 사역을 소개하는 조무영 목사. 최화랑 기자 다섯 번째 교회 건축비 중 이천만 원은 한 장로님이 헌금했다. 처음엔 어머니 이름으로 천만 원. 일주일 뒤 다시 전화가 왔다. "부모가 두 분이잖아요. 아버지 이름으로 천만 원 더 하겠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는 자녀의 헌금이 이역만리 필리핀에 교회 한 채를 세웠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했을까. 조 목사의 대답은 단순하다. "내가 못해도 하나님이 하신다. 까마귀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다." 그가 말하는 '까마귀'는 이름 모를 방문자들이다. 지나가다 들른 이들이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돈을 딱 맞게 건네고 간다.
합동 총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8호. 이 지정이 주목받는 것은 단지 오래된 건물 때문이 아니다. 이름 없는 7명의 기도가 119년을 이어왔고, 일제 치하에서 손으로 지은 예배당이 아직 서 있으며, 문짝을 등에 지고 걸어온 여인의 믿음이 기록됐기 때문이다.
서까래 등 옛 구조가 그대로 보존된 중인교회 새잡리예배당 내부 모습. 최화랑 기자
중인교회는 한 번도 주일 예배를 쉰 적이 없다고 교인들은 증언한다. 교단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던 침체기에도. 그 연속성 자체가 하나의 신앙 고백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믿음의 발자취가 자랑스럽습니다. 이 역사를 후대에 전하고 싶습니다. 최후에 이기는 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조무영 목사의 말이다.
1907년, 이름도 알 수 없는 주은숙씨 외 6명이 사랑채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 기도가 119년을 살아있어, 오늘도 모악산 자락에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