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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식비 1300만원 내라"…재판 열린 줄도 몰랐던 태국 노동자[법정B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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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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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가본 적도 없는데 '패소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태국인 이주노동자 나콤(가명·31)씨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통장이 압류되고서야 판결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자신을 상대로 한 1심 법원 판결이 이미 나와 있었고, 약 1300만 원을 내야 한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나콤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건 D건설. 나콤씨를 고용했던 건설회사였습니다. 회사 측은 "숙박비와 식대를 대신 내줬는데 계약기간을 채우지 않고 퇴사했다"며 반환 소송을 냈습니다.
 
이후 나콤씨는 '추완항소'라는 절차를 통해 다시 법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판결이 있었던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해 제때 항소하지 못한 경우, 뒤늦게라도 항소 기회를 다시 달라고 요청하는 제도입니다.
 
오늘 법정B컷은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제기된 '숙식비 반환 소송' 항소심 재판정으로 가봅니다.

"이렇게는 못 일하겠습니다"…나콤씨가 진정서를 접수한 이유

나콤씨는 2023년 고용허가제(E-9) 비자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D건설과 근로계약을 맺고 건설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콤씨가 본 실제 근무 환경은 계약서와 달랐습니다. 계약서상 사업장이 아닌 서산·음성·양주·연천·용인 등 전국 각지 현장으로 반복적으로 이동해야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이동은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집중됐다고 합니다.
 
결국 나콤씨를 포함한 태국 노동자 6명은 의정부이주노동자센터 도움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진정서에는 "연천에서 양주, 용인, 화성, 음성 등 광역지자체를 넘어 빈번하게 이동하며 근로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은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사업장 외에서 근로를 제공하게 한 것으로 충분히 의심될 수 있습니다."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후 회사 측과 노동자들은 '합의해지' 형식으로 근로계약을 종료했습니다. 실제 회사가 제출한 고용변동 확인서에도 계약 종료 사유는 "당사자 간 자율 합의에 의한 근로계약 해지"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몇 달 뒤, 회사는 나콤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숙박비와 식대를 대신 지급했는데 계약기간을 채우지 않고 퇴사했으니 돌려달라"는 취지였습니다. 청구 금액은 1100만 원대였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나콤씨는 자신이 소송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고, 결국 한 번도 법정에 나오지 못한 채 패소 판결을 받았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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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완항소'로 얻게 된 두 번째 기회…'피고' 나콤의 입장

나콤씨가 '피고'인 항소심 재판은 서울남부지법에서 화상재판으로 진행됐습니다. 재판정 대형 스크린에는 나콤씨 측 소송대리인과 D건설 측 법률대리인이 분할된 화면 속에 차례로 등장했습니다.
 
재판장은 양측 대리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2026.5.15. D사의 나콤씨에 대한 '숙박비 및 식대 청구의 민사 소송' 항소심 변론기일
판사: "피고(나콤씨)는 대리인 바뀌어서 나오고 계시잖아요. 1심은 사실 공시로 진행됐고…. 항소심에서도 원고에서 대리인 나오신 게 2회 변론기일부터거든요. 2회 이후에 지금 본격적 재판하고 있는 셈이고."
여기서 눈에 띄는 표현은 '본격적 재판'입니다.
 
나콤씨 사건 1심은 '공시송달'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공시송달은 소장 등 재판 서류가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을 경우, 법원이 게시판이나 관보 등에 내용을 게시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서류가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절차입니다.
 
민사소송은 형사재판과 달리 피고(형사재판에선 '피고인')가 직접 출석하지 않아도 재판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법원이 송달 절차가 적법하게 이뤄졌다고 판단하면, 당사자가 실제로 재판 사실을 알았는지와 별개로 심리를 이어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나콤씨 사건도 그렇게 진행됐습니다. 당시 나콤씨에게는 법률대리인도 없었습니다. 결국 피고 측 누구도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1심 재판이 열렸고, 법원은 원고 측 주장과 제출 자료를 중심으로 심리를 진행한 뒤 판결을 내렸습니다.
 
나콤씨는 뒤늦게 변호인을 선임해 '추완항소'를 제기했습니다. 판결이 있었던 사실 자체를 몰라 제때 항소하지 못한 경우, 예외적으로 다시 항소 기회를 부여하는 절차입니다.

항소심 쟁점…합의해지·숙박비 정산 사전 합의 여부·실제 금액

항소심의 핵심 쟁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나콤씨와 D건설 사이 근로계약이 정말 '합의해지'로 종료된 것인지입니다. 만약 양측이 서로 동의해 계약을 끝낸 것이라면, 회사 측이 뒤늦게 "일방적으로 무단 퇴사했다"며 책임을 묻는 게 가능한지를 따져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숙박비·식대 공제에 대한 사전 합의가 실제로 있었는지입니다.
 
나콤씨 측은 "숙식비를 나중에 정산하기로 합의한 적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약 2년 가까이 급여명세서 어디에도 관련 공제 항목이 없다가, 퇴사 직전에야 '추후 공제 예정' 문구가 새로 들어갔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회사 측은 "숙식비는 원래 노동자 부담이었고, 회사가 우선 대납한 뒤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실제 사용액을 정산하기로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쟁점은 금액 자체입니다.
 
나콤씨 측은 회사가 청구한 1300만 원 상당 숙박비·식대 액수 역시 제대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지출 내역과 산정 방식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국 이 재판은 단순한 '숙식비 반환 소송'을 넘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과 근로계약 합의해지, 그리고 공시송달로 진행된 민사재판에서의 방어권 보장 문제까지 아우르는 사안이 되었습니다.

지난달 26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2026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위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연합뉴스지난달 26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2026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위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연합뉴스

같은 '합의해지'인데 정반대 입장…이면엔 이주노동자 현실  

원고(D건설) 측은 합의해지 사실 자체는 인정합니다. 고용허가제상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옮기려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회사 귀책이 인정될 경우 회사 측이 행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D건설 측은 그 부담을 피하기 위해 '합의해지' 방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 2026.5.15. D사의 나콤씨에 대한 '숙박비 및 식대 청구의 민사 소송' 항소심 변론기일
원고 측 변호사: "물론 이런 경우들이 흔히 발생합니다. (중략) 근무지 변경이 일어나면 신고를 하면 저희들이 제재를 받는 경우가 있어서요. 그래서 업무지 변경을 잘 안 해줍니다. 근데 24년 당시 폭염도 많고…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런 취지로…"
즉 합의해지는 '사업장 변경을 위한 절차'였을 뿐, 숙식비 반환 의무와는 별개이고 나콤씨에게 귀책 사유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반면 피고(나콤씨) 측은 합의해지로 계약이 종료된 이상 일방적 무단퇴사로 볼 수 없고, 따라서 반환 의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맞섭니다. 또 회사의 귀책 사유가 있음에도 합의해지로 마무리한 것은 생계가 달린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었다는 입장입니다.
▶ 2026.5.15. D사의 나콤씨에 대한 '숙박비 및 식대 청구의 민사 소송' 항소심 변론기일
피고 측 변호사: 재판장님, 저희가 진정서는 저희도 가지고 있는데요. 이게 사실 외국인 근로자로서 고용 관련 진정을 할 자유도 있었고, 다만 피고(나콤)가 원고(D사) 귀책사유를 입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합의해지를 통해 사업장 변경을 한 건데요.
지금 관련 자료를 다 제출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원고가 입증해야 하는 '피고의 귀책사유로 사업장 변경이 됐다', 혹은 '무단이탈했다'라는 부분은 사실상 이 사건 노동청 기록과는 전혀 무관한 거라서요.
결국 나콤씨의 합의해지는 동의가 아니라, 장기 분쟁을 버틸 여유가 없었던 이주노동자의 현실적인 결과였던 겁니다.
 
D건설이 소송에서 나콤씨에게 청구한 숙식비는 1100만 원대였습니다. 이후 판결이 확정되고 지연손해금과 소송비용 등이 더해지면서, 나콤씨가 뒤늦게 통보받은 금액은 1300만 원 수준이 됐습니다.
 
나콤씨가 1년 동안 지급받은 총급여 2500만 원의 절반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나콤씨의 사건은 한국어도, 법률 절차도 낯선 이주노동자가 민사소송에 휘말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법정에 한 번도 나와보지 못한 채 '패소자'가 된 나콤씨는, 항소심에서도 1년 급여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부담하게 될까요.
 
이 소송의 다음 변론기일은 오는 8월, 뜨거운 여름에 열립니다. 아마 나콤씨는 그때도 한국의 어느 건설현장에서 가족에게 보낼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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