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해바라기센터 별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의료지원팀 소속 심현지 간호사가 성폭력 증거 채취 응급키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평등가족부 제공4살 딸을 목욕시키던 엄마는 아이의 말과 몸에 남은 흔적으로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심장을 붙잡고 성폭력상담소에 전화 상담한 후 집 근처 산부인과에 갔지만 문전박대 당했다. 경찰병원으로 가보래서 갔더니 이번엔 경찰 동행이 필요하다고 했다. 경찰에 갔더니 병원 진료기록이 필요하단다. 그러나 경찰이 추천한 병원에서도 진단서 발급을 거부했고, 병원 근처 파출서에도 가봤지만 관할이 아니라며 접수해주지 않았다. 엄마는 꼬박 35시간, 이틀을 거리에서 헤매야 했다. 그리 먼 옛날도 아닌 2003년. 4세 성폭행 피해자가 병원과 수사기관의 거부로 이른바 '뺑뺑이'를 돌아야 했던 일이 있었다. 성폭행 피해가 발생한 직후 이틀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천금 같은 시간이다. 어린 아이나 장애가 있는 등 피해자의 진술을 명확히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엔 더욱 그렇다.
심각한 현실이 알려지고 약 7년 후인 2010년. 성평등가족부(당시 여성가족부)와 각 지방자치단체, 경찰, 지역 내 종합병원급 병원 등 '4자 공동 협력체계'를 구축한 성폭력피해자통합지원시스템이 출범했다. 2026년 현재 전국 41곳에서 운영 중인 해바라기센터다.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등 피해를 당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24시간 365일 가까운 해바라기센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경찰과 간호사, 상담사가 한 데 모인 이곳에서 피해자는 응급치료와 증거채취, 피해사실 진술과 상담, 수사절차 진행과 법률자문까지 한 번에 진행 가능하다.
24시간 365일 운영, 사건 초기부터 사후관리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대로변에 위치한 서울해바라기센터 본관에서는 응급 진료와 증거 채취, 심리상담 등을 지원한다. 피해자들에 대한 사후 심리 지원 등을 이어가는 별관은 잦은 방문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피해자들을 위해 골목길 안쪽에 자리잡았다. 성평등가족부 제공
정명신 서울해바라기센터 소장은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소재 센터 별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해바라기센터는 운영을 맡은 기관이 종합병원급 병원이라는 게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피해 직후 초기 치료부터 법의학적 증거 채취, 소견서 작성까지 피해자가 직접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니며 문의하지 않아도 매끄럽게 이어진다.
의료비는 무료다. 종합병원이 연계된 만큼 피해자의 몸 상태에 따라 산부인과 진료 외에 정신과나 치과, 항문외과 등 다른 진료과와의 협진도 자연스럽게 가능하다. 성폭력 피해자 주변의 가족과 지인 등이 겪는 간접적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등에 대해서도 무료로 진료 지원이 이뤄진다.
종합병원들이 응급실을 운영하는 것처럼 해바라기센터 역시 연중무휴다. 해바라기센터의 밤 근무는 저녁 6시에 시작해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이뤄진다. 경찰과 간호사, 상담사 등은 주간과 야간 근무를 교대로 하며 센터가 비는 일이 없도록 지킨다.
정 소장은 "2003년 사건 외에도 피해자들이 수사기관과 병원을 오가며 뺑뺑이 도는 일이 굉장히 많았다"며 "피해자는 반복적으로 진술을 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 해바라기센터는 초기 위기 개입부터 사후관리까지 원스톱 시스템으로 피해자의 신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센터는 한국어가 어려운 외국인이 피해를 당한 경우에도 이주여성 상담센터나 경찰청에 등록된 전문 통역사를 통해 법적 효력 있는 초기 진술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같은 4자 협력 체계는 세계에서도 유일하다. 정 소장은 "미국은 병원 응급실을 중심으로 필요한 경우 경찰과 상담사 등 전문가를 요청하는 시스템이고, 영국과 호주엔 우리와 비슷한 센터가 있긴 하지만 경찰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각각 장단점이 있겠지만 해바라기센터의 시스템이 가장 피해자 조력 범위가 넓다"고 설명했다.
내가 당한 게 성폭력? 헷갈리면 일단 이렇게
지난 한 해 해바라기센터에 접수된 피해 사례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경우는 7%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학교와 직장 등에서 사회적 관계가 있었거나(27%), 일시적으로 알던 사이(19%), 연애상대(9%), 가족과 친인척(9%) 등 면식범이다.
때문에 피해자가 범죄 발생 즉시 "내가 성범죄를 당했구나"라고 스스로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치 않는 성관계나 접촉이 있었던 건 맞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신이 아득한 경우도 많다.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신고를 해야 할지 헷갈리고 모두 자신의 잘못 같다는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
12단계로 구성된 해바라기센터의 성폭력 증거채취 응급키트. 정다운 기자이처럼 혼란스럽고 아무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일 수록, 해바라기센터에 연락하는 것만으로 가장 중요한 초기 증거·진술을 남겨둘 수 있다. 특히 총 12단계로 촘촘한 성폭력 증거채취 절차를 마련해둔 응급키트는 초기 물적 증거를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응급키트를 개봉하기 전 간호사는 피해자와 의료 상담을 진행해 가해자의 DNA가 채취될만한 곳이나 양치·샤워·용변행위 등으로 인한 소실 가능성, 피해자의 병력이나 약물·마약 피해 의심 상황, 범죄로 인한 신체 손상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한다.
피해자 동의와 문진표 작성을 거치면 파란색 포를 바닥에 깔면서 증거 채취가 시작된다. 피해자가 그 위에서 탈의하도록 해 가해자의 체모나 섬유 조각 등 작은 증거도 소실되지 않도록 한다. 피해자의 손톱이나 피부, 구강 등을 꼼꼼히 체크하는 것은 물론이고 혈액과 소변 등도 채취한다. 강간 피해를 당한 경우 총 3~4시간가량 증거 확보 과정을 밟는다.
12단계로 구성된 해바라기센터의 성폭력 증거채취 응급키트. 정다운 기자
다만 응급키트는 피해자가 경찰 고소나 최소 진정을 제기한 경우에 한해 진행될 수 있다. 피해자가 당장 수사기관에 사건을 알리길 원치 않는다면 상담과 병원 진료 등으로 연계하고 있다.
최근 신체에 대한 성범죄와 연계되거나 독자적으로 디지털 성범죄가 크게 늘어난 만큼 인격 손상에 대한 심리상담도 늘었다. 사진·영상 유출이 의심되는 경우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나 경찰 사이버수사대와 협력해 차단을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
2010년 해바라기센터가 문을 열고 2011년 2월 지원업무를 개시한 후 올해 5월까지 총 서비스 건수는 23만 4866건이다. 응급키트는 월평균 25건 실시되고 있다.
피해자는 법정에 가지 않고도 해바라기센터에서 화상연결로 증언할 수 있다. 증언 시엔 센터의 신뢰관계인이 동석한다. 성평등가족부
경찰과 검찰을 거쳐 가해자가 재판에 넘어간 후에도 조력이 이어진다. 피해자가 법정에 직접 출석해 증언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재판부와 협의에 따라 해바라기센터에서 화상 연결로 증언할 수 있다. 법률구조공단이나 성평등가족부 등을 통해 법률 자문도 받을 수 있다.
김재원 서울해바라기센터 센터장(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심리상담·의료·수사·법률자문을 원스톱 통합지원하는 시스템은 전세계적으로 한국이 유일하다"며 "지원이 필요한 피해자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