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이 만든 한국형 인공지능 모델이 지난달 말부터 차례로 공개됐다. 이제 이 모델들이 겨뤄야 할 것은 한국어 실력이 아니라 한국 현장의 판단력이다. 그리고 그 판단력은 모델이 아니라 학습 데이터에서 온다.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 작업대에는 이런 사진이 올라온다. 잎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말라 있는데, 병의 초기 증상인지 강한 볕에 그을린 자국인지 갈린다. 사진마다 정답 이름표를 붙이는 이 일을 데이터 라벨링이라 부르고, 그 이름표가 인공지능의 교재가 된다. 작업자는 앞뒤 사진을 넘겨 보고 지침서를 다시 펴고 비슷한 사례를 뒤진 끝에, 병의 증상을 뜻하는 '병징'을 고른다. 시스템에 저장되는 것은 그 한 단어다. 판정에 걸린 몇 분과 그 사이의 저울질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한 작업대만의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은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를 구축해 AI 허브로 개방한다. 진흥원이 마련한 AI 데이터 품질관리 가이드라인이 그 품질관리의 기준과 절차를 정한다. 재라고 하는 것은 결과물이다. 이름표가 정답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형식이 규격에 맞는지가 의미 정확성과 구문 정확성 같은 항목으로 짜여 있다. 데이터를 만드는 과정을 관리하라는 지침도 함께 있고, 작업자 간 교차 검수와 이견 조율도 절차로 권고한다.
다만 공개된 가이드라인의 품질지표와 산출물 항목에서는, 작업자가 경계 사례를 어떤 근거로 판정했고 이견을 어떻게 조율했는지를 데이터의 일부로 내도록 요구하는 항목을 찾기 어렵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검사는 셀 수 있는 것을 재고, 고민은 세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전국의 작업대에서 판단은 매일 발생하고 매일 증발한다. 판단의 이유도 데이터로 받아 두자고 제안한다.
이름표만 정확하면 그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반론에 답이 되는 인터뷰가 하나 있다. 1983년 영국 BBC가 '상상하는 즐거움'이라는 뜻의 과학 인터뷰 시리즈 '펀 투 이매진'을 방영했다. 이 시리즈를 만든 크리스토퍼 사익스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에게 물었다. 자석은 왜 서로 밀어내는가. 파인만은 바로 답하지 않고 '왜'라는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따졌다. 예를 하나 들었다. 이모가 병원에 간 이유는 빙판에 미끄러져 엉덩이뼈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이 답이 답으로 통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빙판과 골절과 병원을 이미 알기 때문이고, 그것들을 모르는 이에게는 같은 문장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답은 듣는 사람이 이미 아는 것들 위에서만 선다. 그래서 파인만은 자석 질문 앞에서 당신에게 익숙한 다른 무엇으로도 이 힘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로 이미 알고 있다고 인정하는 바탕이 없으면 물리학자도 설명을 시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통찰을 데이터로 가져오자. 이름표는 답이다. 그리고 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위에서만 선다. 애매한 사진 앞에서 작업자가 동원한 것이 바로 그 바탕이다. 작업자는 앞뒤 사진을 견주고, 지침서를 다시 읽고, 비슷한 사례를 떠올렸다. AI가 배워야 할 것은 '병징'이라는 한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에 이른 길이다. 결과만 남은 데이터는 답안지만 있고 풀이가 찢겨 나간 문제집과 같다. 답을 외울 수는 있어도 푸는 법은 배울 수 없다. 이유가 증발한 데이터는 절반만 남은 데이터다.
AI 개발 경쟁의 최전선에 선 회사들은 이미 그 나머지 절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챗GPT를 만든 오픈AI는 2023년 '단계별로 검증하자'라는 연구에서, 수학 문제의 최종 답만 채점하는 대신 풀이 과정의 단계 하나하나에 사람이 옳고 그름 판정을 붙였다. 그렇게 만든 80만 개의 단계별 판정으로, 풀이가 맞는지 살피는 채점용 AI를 가르쳤다. 풀이 과정을 보고 배운 쪽이 정답만 보고 배운 쪽보다 채점에서 더 나은 성능을 보였다고 오픈AI는 보고했다.
중국의 AI 기업 딥시크도 같은 길을 갔다. 2025년 1월 기술보고서에서, 답을 내기 전에 길게 생각하는 AI가 낸 추론 응답으로 몸집이 가벼운 모델들을 가르친 결과를 내놓았다. 두 사례가 다룬 것은 사람이 적은 문장이 아니라 모델이 만들어 낸 풀이다. 그래서 이 제안과 똑같지는 않다. 다만 정답의 목록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것이 과정에 있다는 점은 같다.
데이터 납품 검사에 판단 기록 항목을 더하자. 작업자가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고민했고 무엇을 근거로 정리했는지 몇 줄로 적어, 정답 이름표와 함께 데이터의 일부로 내게 하자는 것이다. 아직 제도에 없는 제안이지만 검사표에 줄 하나를 늘리는 일이다.
기록은 현장을 느리게 한다. 쉴 새 없이 사진을 처리해야 하는 작업자에게 기록 의무까지 얹으면 남는 것은 통찰이 아니라 기록을 위한 기록일 수 있다. 이 반박은 옳다. 옳은 만큼, 제안도 이 반박에 맞춰 좁혀야 한다.
증발하는 모든 것을 받아 둘 그릇은 세상에 없다. 받을 것은 작업자가 정말로 멈춰 섰던 소수의 사진, 이것인지 저것인지 판정이 갈리는 경계 사례뿐이다. 쉬운 사진을 아무리 쌓아도 판단의 규칙은 나오지 않지만, 갈리는 사진 몇 장의 판단 기록은 규칙을 만든다. 작업자가 적은 이유가 판정을 마친 뒤 지어낸 설명일 수 있다는 반박도 있다. 그래서 받을 것은 매끄러운 설명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갈렸는지, 어느 자료를 다시 펴 보았는지처럼 뒤에 확인할 수 있는 항목이어야 한다. 물론 이 기록도 그대로 정답으로 쌓을 것이 아니라, 다음 지침을 고치는 자료로 먼저 써야 한다.
이 기록에 얼마를 쳐줄 것인가. 그 답도 앞의 반박 안에 있다. 그 몇 줄에는 이름표 한 장처럼 값을 매겨야 한다. 값이 붙지 않은 기록은 형식이 되고, 형식이 된 기록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왜의 증발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유의 기록은 양심에 기대면 사라지고, 회계에 올리면 남는다. 단가표에 줄 하나를 더하자는 뜻이다. 기록은 조금만 받되 받은 것에는 제값을 치르는 것, 그것이 증발을 막는 설계다.
그렇게 받아 둔 기록에는 판정이 갈렸던 사진과 그때 무엇을 보고 정했는지가 함께 남는다. 다음 데이터 사업의 검사표와 단가표에 판단 기록 한 줄을 넣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한 단어는 저절로 남는다. 몇 분은 적어야만 남는다. AI가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란 답이 쌓인 데이터가 아니라 왜가 함께 적힌 데이터다.
김철현 국립농업과학원 현장명예연구관·한국지방자치학회 AX특별위원회 이사·(주)카라멜라 CSO영문기사 보기 (View English Article)※ 외부 필진 기고는 CBS노컷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