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도 나라살림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리는 동시에 108조원에 육박하는 기존 재정의 구조조정에 나선다. 재량지출에서 역대 최대인 38조6천억원을 줄이고 전체 사업의 10%가 넘는 2100여개 사업을 폐지한다. 교육교부금과 지방교부세, 구직급여 등 법령에 따라 지출되는 의무지출에서도 69조원 규모의 구조개혁을 추진한다.
내년도 총지출을 올해보다 93조원 늘리면서도 기존 지출과 제도에서는 107조6천억원 규모를 다시 손보는 셈이다.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대규모 세수 증가를 기존 사업에 그대로 얹기보다 저성과·비효율 사업을 정리하고 경제·사회 변화에 맞지 않는 지출구조를 손질해 재원을 새로운 성장 분야 등에 재배치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1일 국무회의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의 '2027년도 예산안'을 의결했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소중한 국민의 세금이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꼭 필요한 곳에 투자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여 불요불급한 사업은 과감히 감축·폐지했다"고 밝혔다.
2100개 사업 없앤다…재량지출 38.6조 역대 최대 구조조정
정부는 모든 재정사업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들여다봤다. 우선 정책적 판단에 따라 조정할 수 있는 재량지출에서 38조6천억원을 줄인다. 역대 최대 규모로, 정부가 세운 재량지출 15% 감축 목표에 해당한다.
정부의 재량지출 구조조정 규모는 2022년 12조8천억원에서 2023년 24조1천억원, 2024년 22조7천억원, 2025년 23조9천억원, 올해 26조9천억원으로 늘어왔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다시 11조7천억원 확대된다. 전체 사업의 10%가 넘는 2100여개 사업도 폐지된다.
구조조정은 소규모·관행적인 경상비부터 저성과 사업,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유사·중복 사업까지 폭넓게 이뤄진다.
온라인 홍보 전환과 행사 축소 등을 통해 1천억원을 절감하고 회의·교육의 비대면 전환, 관행적인 정책연구와 유지보수비 감축 등으로 5천억원을 줄인다. 특정업무경비도 직무에 따라 차등화해 48억원을 감축한다.
사업비에서는 농·어업 정책자금을 통폐합하고 재생에너지 융자를 이차보전 방식으로 전환해 3조8천억원을 줄인다. 전 부처 정보화 사업을 전수조사해 사용하지 않는 시스템을 통폐합하면서 517억원을 절감한다.
기술 변화와 사업 성과 등을 반영해 R&D 사업에서는 6조2천억원을 구조조정하고 저성과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에서도 9천억원을 줄인다. 국가장학금 Ⅱ유형을 폐지해 2천억원, 일반 직무훈련 축소를 통해 3천억원을 각각 감축한다.
정부는 추가 세수가 크게 늘어난 상황에서도 기존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한 재원을 핵심 국정과제로 돌린다는 방침이다. 기획처 박창환 예산총괄심의관은 상세 브리핑에서 "많은 추가 세수가 있었음에도 저성과·비효율 사업은 과감히 감축·폐지해서 핵심 국정과제에 재투자했다"고 설명했다.
의무지출도 69조 손질…교부세·교부금이 63조
이번 구조조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법령 등에 따라 지출 규모가 결정돼 손대기 어려웠던 의무지출까지 구조개혁 대상에 포함한 점이다.
정부가 제시한 의무지출 구조개혁 규모는 모두 69조원이다. 이 가운데 지방교부세가 30조5천억원,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32조5천억원으로 두 항목만 63조원에 달한다. 구직급여에서도 1조4천억원 규모의 제도개편을 추진한다.
특히 교육교부금은 55년 만에 산정방식 자체를 뜯어고친다. 현재는 내국세에 일정 비율을 연동해 교육교부금을 산정하지만 앞으로는 전년도 교부금에 최근 3년 평균 경상성장률과 학령인구 변화율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학령인구 감소 등 교육환경 변화와 무관하게 내국세가 늘면 교부금도 함께 급증하는 현행 구조를 손질하겠다는 취지다.
지방교부세와 교육교부금에서는 최근 10년간 내국세 추세선을 웃도는 추가 세수분을 미래대응기금으로 돌린다. 정부는 이를 통해 반도체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를 단년도 지출로 모두 소진하지 않고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등에 투자하거나 향후 세수 변동에 대응하는 재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구직급여 역시 무급휴일을 지급일수에서 제외해 지급 기준을 주 7일에서 6일로 바꾸고 조기재취업수당 지급대상을 조정한다. 정부는 이를 통해 재취업 유인을 높이고 절감 재원은 모성보호 등 저출생 대응에 재투자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정부가 제시한 107조6천억원 전체를 기존 사업을 없애거나 예산을 삭감해 확보한 돈으로 보기는 어렵다.
재량지출 38조6천억원은 기존 사업의 감축·폐지와 효율화가 중심이지만, 의무지출 69조원에는 현행 제도를 유지했을 경우 추가 세수와 함께 늘어날 지방교부세와 교육교부금의 증가분을 조정하는 효과도 포함돼 있다. 실제 두 교부금 관련 조정액만 63조원으로 의무지출 구조개혁의 90%가 넘는다.
기존 사업을 줄이는 재량지출 구조조정과 앞으로 늘어날 의무지출을 억제하는 제도개편을 합쳐 107조6천억원으로 제시한 셈이다.
세액공제 대신 직접지원…재정 지원방식도 손질
정부는 지출구조뿐 아니라 재정을 지원하는 방식도 손질한다. 세금을 깎아주는 조세지출 가운데 17개 사업, 1조9천억원 규모를 직접적인 재정지출로 전환한다.
혼인·출산 세액공제를 재정지원으로 전환하고 대중교통 소득공제는 K-패스 환급 확대와 연계한다. 전기차 구매 세제혜택도 구매보조금으로 통합한다. 세액공제 방식으로는 혜택을 받기 어려운 저소득층까지 지원 범위를 넓히고 정책 체감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정부가 단순 보조자가 아니라 투자자로 참여해 성과를 공유하는 방식도 도입한다. 화합물 반도체와 유전자·세포치료제 등 개발 위험이 크지만 성공할 경우 파급효과가 큰 R&D에는 지분투자형 방식을 도입하고, GPU 1만장을 지원하는 프런티어급 AI 모델 사업도 정부 출자 방식으로 추진한다.
박 장관은 "과거에는 시장의 부족함을 단순히 보완하는 역할 정도였다면 지금은 말 그대로 초격차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걸고 경쟁하는 시기"라며 "재정의 역할이 한편에서는 그런 초기 투자자, 초기 수요자 역할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7개 부처에 흩어진 주가조작·담합 등 반사회적 행위 신고포상금 재원 약 3천억원을 통합 관리하는 공익신고장려기금도 신설한다.
구조조정 상시화…절감 재원은 핵심사업으로
이번 구조조정은 재정 규모 자체를 줄이는 긴축과는 성격이 다르다. 내년도 총지출은 820조9천억원으로 올해보다 93조원(12.8%) 늘어난다. 역대 최대 증가율이다. 한쪽에서는 지출을 크게 늘리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107조6천억원 규모의 기존 지출과 제도를 손보는 것은 결국 재정의 우선순위를 대규모로 바꾸겠다는 의미다.
특히 반도체 호황 등으로 세수가 큰 폭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기존 사업을 그대로 확대하기보다 저성과 사업을 정리하고 의무지출 구조를 개편해 AI·반도체 등 미래 성장 분야와 청년·지역 등에 재원을 다시 배분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는 이 같은 지출구조 개편을 내년 한 해에 그치지 않고 중기적으로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도 유사·중복, 저성과·비효율 사업을 지속적으로 정비하고 경제·사회구조 변화를 반영해 의무지출을 개편하기로 했다. 절감 재원은 AI·반도체 등 성장잠재력 확충과 양극화 완화를 위한 핵심 사업에 다시 투입한다.
기획처 임영진 재정혁신정책관은 "유사·중복, 저성과·비효율 사업을 획기적으로 정비하고 의무지출 또한 적극적으로 혁신하겠다"며 "절감 재원은 '대체불가 대한민국' 구현을 위한 핵심 프로젝트에 전략적으로 재투자하여 재정운용 체질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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