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 연합뉴스지난 7일 프랑스 생폴드방스에서 열린 '뤼미에르 서밋(Lumière Summit)'은 한국과 프랑스가 공동 주최한 영화·영상 분야 최초의 국제 정상회의다. 이재명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이 공동 의장을 맡았고 세계 각국의 문화 관료와 영화·영상 기업인 및 영화 창작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개막 연설에서 독립영화 지원을 통한 문화 다양성 수호, 로컬과 글로벌의 상생, 인간과 인공지능(AI)의 공존 등을 핵심 의제로 제시했고 이를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한국과 프랑스 양국은 '뤼미에르 파트너십'을 결성해 2027년부터 2031년까지 각각 8000억 원(5억 유로)을 영화·영상산업에 투자하기로 선포했다.
이번 정상회의는 단지 높아진 한국 문화의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문화적 다자주의'라는 글로벌 패러다임의 수행 과정에서 한국이 프랑스와 함께 새로운 중심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 문화 관계자들에게 각인시키는 자리였다.
5대륙 60여 개국에서 모인 이 '영화계의 다보스' 참석자들은 영화의 종주국이자 전통적인 문화예술 강국인 프랑스와 신흥 문화예술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이 전 세계 문화 산업의 변화와 혁신을 선도할 리더임을 확인하고 인정했다.
사실 이번 회의는 거대 자본의 플랫폼 독점과 온라인 스트리밍의 전 지구적 범람으로 촉발된 영화·영상 산업의 근본적 위기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됐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격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흔들리는 영상 제작 환경과 심각한 창작권 침해에 맞서기 위해 공동의 해법과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이 대통령의 개막 연설도 이 점을 명확히 강조한다. 극장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고 독립 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지원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내야만, 로컬 콘텐츠의 지속적 생산과 글로벌 차원의 상생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다자주의적 영화·영상 정책을 함께 이끌어갈 최적의 파트너로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의 영상 창작자들은 전 세계 모든 국가를 능가하는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면서도 서구 국가들이 해내지 못한 대중적 파급력과 글로벌한 감각을 보여줬다.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가장 높은 수준의 미학적 완성도를 선보였고 '오징어 게임'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은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유례없는 글로벌 흥행 성적을 거뒀다. 또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물, 리얼리티 쇼 등의 장르에서 세계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으며 애니메이션과 광고 영상 분야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아울러 각종 규제와 사회적 거부감으로 정체 상태에 빠져 있는 유럽과 달리, 국내 영상 산업 종사자들은 AI 기술의 창조적 적용 방안을 다각도로 탐구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신속히 대응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개막 연설에서 강조한 것처럼, AI에 대한 막연한 거부보다 '인간의 창의성과 AI의 조화로운 공존'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프랑스 역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이번 정상회의는 영상 산업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유럽 및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과 작품의 진출 범위를 크게 확대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프랑스가 갖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문화 정책에 심혈을 기울여 온 나라고 특히 문화 '전파자' 역할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라다. 오래전부터 자국 너머의 다양한 문화 예술을 받아들이고 지원해 왔으며 이를 다시 세계 전역에 전파함으로써 세계의 문화 중심지 자리를 지켜왔다.
영화·영상 분야만 봐도 '세계 영화 지원 펀드(Aide aux Cinémas du Monde)' 등을 통해 세계 각국의 우수한 저예산 영화 및 프랑스와 비유럽 제작사 간의 공동제작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왔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불 영화산업의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고 양국의 영상 창작자들을 위한 새로운 국가 간 지원 정책을 마련한다면, 우리의 창의적인 영화·영상 콘텐츠를 세계의 더 많은 국가에 알릴 수 있는 확실한 창구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단 하루 동안의 회의만으로는 막대한 자금이 투자되는 대규모 정책의 구체적인 성과와 성공 여부를 속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티에리 프레모의 언급처럼 "이토록 많은 주요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첫 번째 승리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영화·영상 산업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진행될 혁신적 변화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한국은 그 변화의 선봉에 섰고 아시아 문화 산업을 대표하는 핵심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한 만큼 향후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이 수반된다면 새로운 세계 문화지형도에서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김호영 한양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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