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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감(感), 데이터가 되다[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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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미 FTA 발효 15년째인 올해, 미국산 소고기와 우유·치즈를 비롯한 45개 품목의 관세가 사라졌다. 관세가 사라진 후 국산 농산물이 겨루는 조건은 가격과 품질. 품질의 상당 부분은 이제 데이터와 기술에서 나온다. 노컷뉴스는 생산(경북 영천 포도), 관리(경남 고성 낙농), 유통(경기 이천 딸기 수직농장과 농산물 물류) 세 현장에서 농장에 디지털 엔진을 단 사람들을 만나 FTA 후 국내보완대책 현장을 짚어 봤다.

[K-농업의 새로운 물결, "한국 농업의 디지털 엔진을 달다"①]


▶ 글 싣는 순서
①농부의 감(感), 데이터가 되다
②우유 관세 0%, 소는 로봇이 지킨다
③겨울 딸기가 여름을 열었다

대형마트 수입과일 매대에 놓인 초록색 포도, 칠레·페루산 청포도. 한국으로 들어온 관문은 지난 2004년 4월에 열렸다.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 한·칠레 FTA다.

협정은 국산 포도가 나지 않는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들어오는 포도의 관세를 단계적으로 지웠고, 2014년 1월 마침내 0%가 됐다. 관세청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그해 신선 포도 수입은 5만 9천여 톤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열에 여덟 칠레산이었고 페루와 미국이 뒤를 이었다. 모두 FTA 체결국이다.

같은 기간 국내 포도밭은 뒷걸음질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집계에 따르면 재배면적은 2000년 2만 9천ha에서 2014년 1만 6천ha로, 생산량은 47만 6천 톤에서 27만 2천 톤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포도가 'FTA 피해 품목'의 대명사로 불린 이유다.

박남수 씨 농장에서 재배중인 샤인머스캣. 노컷TV 허태환 PD박남수 씨 농장에서 재배중인 샤인머스캣. 노컷TV 허태환 PD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야기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포도 8375톤을 수출했다. 3년 만에 3.7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 물량의 90% 이상은 껍질째 먹는 초록색 포도 샤인머스캣이다. 경상북도에 따르면 전국 포도 수출의 약 90%는 경북에서 나간다. 전국 유수의 포도 산지인 영천에서는 포도밭의 절반 가량이 샤인머스캣으로 바뀌었다. 영천농협은 재작년 미국에 이어 지난해에는 캐나다에 첫 수출 물량을 실었다. 수입 개방의 상징이던 품목이 수출 품목으로 뒤집히는 동안, 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감으로 주던 물, 습도계가 잡아줬다

영천시 신령면 박남수 씨의 농장은 골조부터 다르다. 나무 사이 재식 간격이 3m로, 관행보다 한 뼘 넘게 넓다. 차광망은 남들이 쓰는 검푸른 색 대신 흰색이다. 빛은 들이되 열은 덜 가두려는 계산이다. 통풍이 돌고 잎이 겹치지 않으니 하우스 안 온도가 내려가고, 잎은 두껍고 빳빳하게 오른다. 폭염이 이어진 지난달에도 잎이 버틴 이유다.

노컷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남수 씨. 노컷TV 허태환 PD노컷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남수 씨. 노컷TV 허태환 PD
그는 원래 마늘 농사꾼이었다. 면적에 비해 소득이 따라주지 않자 4~5년을 공부하고 교육을 받으러 다니며 단위면적당 소득이 높은 작목을 찾았다. 그렇게 고른 거봉 계열 자옥·흑보석을 1400평에 심었다. 그런데 2018년, 한 해 수확만 하고 그 나무를 전부 베어냈다. 공판장에서 목격한 샤인머스캣 가격 때문이었다. "그때는 이 품종이 떠오를 시기였다"고 그는 말한다.

품종을 바꾼 뒤 그의 농사에서 달라진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물 관리다. 작목반을 통해 영천시 농업기술센터의 보조사업으로 밭에 센서가 들어왔다. 땅속 온도와 수분, 양분 농도, 공기 중 온도·습도가 휴대폰 화면에 뜬다. 영천 곳곳의 작목반 회원 농가 10여 곳에 나눠 설치돼 기술센터도 같은 데이터를 들여다본다.

박남수 씨의 농장에 설치된 분사 호스에서 물이 주입되는 모습. 노컷TV 허태환 PD박남수 씨의 농장에 설치된 분사 호스에서 물이 주입되는 모습. 노컷TV 허태환 PD
박 씨는 "과거에 물 주는 건 거의 감이었다. 그것보다 더 정확한 게 습도계인데 이제 물을 정확하게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센서는 측정을 맡고, 상황을 판단해서 밸브를 여는 것은 그의 몫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크다. 온도계를 확인하러 밭에 나올 일이 없어졌고, 시간 단위로 짐작하던 관수가 토양 수분 데이터로 최적화를 맞췄다. 관수가 정확해지자 여름 볕에 포도 알이 손상되는 '일소현상'이 줄고 품질이 고르게 잡혔다. 봄이면 데이터가 알려주는 적절한 시간에 몸이 움직인다. 하루 중 기온이 제일 낮은 새벽 3~4시에 분사호스로 10도 정도의 따뜻한 물을 뿌려 냉해에서 꽃눈을 지켜냈다.

박남수 씨의 휴대폰에 표시된 농장 데이터. 노컷TV 허태환 PD박남수 씨의 휴대폰에 표시된 농장 데이터. 노컷TV 허태환 PD
그의 밭은 이제 수출 규격으로 설계된다. 동남아 시장에 판매하던 시절엔 한 송이 800~900g짜리 큰 포도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600~700g에 당도 17~20브릭스(고형물의 농도를 대략적으로 측정하는 단위, Brix), 알 40~50개짜리 '선진국형'으로 재배한다. 알솎기를 마치면 전체를 한 번 더 훑고 봉지를 씌운다. 농협 수출반에서 잔류농약 교육과 검사를 이수했고, 물량의 70~80%가 미국과 대만으로 나간다. 예전엔 40~50%였다.

수출이란 단어가 나오자 그는 중국 얘기를 먼저 꺼냈다. 중국산 포도가 품질을 계속 따라오고 있고, 단가가 맞는 시장으로 물량이 몰린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농사도 글로벌 경쟁이다. 국내만 보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움직이는 밭

박 씨의 포도밭이 데이터가 '보는' 도구라면, 같은 영천 고도리의 이승진 씨 밭에서는 데이터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움직인다.

이 씨의 샤인머스캣은 무너진 밭에서 시작됐다. 2016~17년 무렵 겨울, 폭설로 쌓인 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거봉 하우스가 내려앉았다. 밭을 다시 세우면서 그는 아직 낯설던 샤인머스캣 품종을 과감히 선택했다. 영천에서도 이른 축에 들어가는 도입이었다. 그리고 그 재기의 기반에는 FTA 국내보완대책 자금이 큰 역할을 했다. 무너진 자리에서 보완대책 자금으로 미래 품종에 올라탄 셈이다.

인터뷰 중인 이승진 씨. 노컷TV 허태환 PD인터뷰 중인 이승진 씨. 노컷TV 허태환 PD
그의 품종 선택엔 남다른 계산이 있었다. 거봉 농사의 최대 난제는 색을 내는 일이다. "샤인머스캣은 원래 색이 초록이다 보니 다른색을 낼 필요가 없고, 당도와 식감만 살리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착색이라는 리스크를 지우고 다른 변수에 집중하는 선택이었다.

이 씨가 변수를 잡은 방법은 자동화 시설이었다. 하우스 내부의 순환팬은 26도가 넘으면 자동으로 돈다. 정부 보조사업으로 50%를 지원받아 설치했다. 하우스 내 열이 한곳에 고이지 않으니 열과와 병해 관리가 수월해졌다.

관수 또한 전 과정을 자동화로 구축했다. 설비 도입 전까지는 모든 과정을 직접 했고, 사람이 하는 일이다보니 실수가 발생했다. 그는 "물을 틀어놓고 끄는 걸 까먹어서 24시간 튼 적도 있고, 며칠 동안 물 주는 걸 잊은 적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밭을 돌며 물을 주던 일과가 사라지자 그는 온전히 포도 관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자동화의 결과는 균일함이다. 이 씨는 "한 송이에 큰 알, 작은 알이 섞이면 수출에서 빠진다. 자동화를 하니 알 크기와 당도가 균일해졌고, 수출 비중이 많이 올라갔다"고 전했다. 현재 이 씨의 밭에서 재배하는 2만 송이 중 70~80%가 수출길에 오른다. 그의 목표는 90%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승진 씨 농장에 설치된 순환팬과 온도계 센서. 노컷TV 허태환 PD이승진 씨 농장에 설치된 순환팬과 온도계 센서. 노컷TV 허태환 PD
이 씨의 포도에는 'For USA'라고 적힌 봉투로 포장돼있다. 나라마다 허용 농약 목록(PLS)이 달라서, 수출 포도는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해 놓고 그 나라 기준으로 재배한다. 여기에서 이 씨의 전략이 숨겨져 있다. 바로 가장 엄격한 기준에 맞춰 재배하면 다른 나라 길도 함께 열린다는 게 그의 계산이다. 그는 유럽 수출 관문인 '글로벌 GAP' 인증도 받았고 수질과 토양, 시설을 1년에 두 차례 심사받는다. 고품질 생산을 통해 재배된 포도는 이미 싱가포르와 네덜란드에도 납품하기 시작했다.

수출로 방향을 튼 배경을 그는 담백하게 설명한다. 이 씨는 "워낙 국내 시장 가격이 수출보다 월등히 높았다. 국내 가격이 내려가면서, 잘 짓는 농가들이 해외로 팔게 되면서 수출 가격이 올라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도향에 대한 고집은 이 씨의 품질 마지노선이다. 그는 "향이 안 나는 샤인머스캣은 샤인머스캣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샤인이 아니라, '수출 규격의 샤인'

물론 샤인머스캣 전환이 만능열쇠는 아니었다. 전국의 밭이 일제히 같은 품종으로 몰리면서 공급이 넘쳐버린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가격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샤인머스캣 소매가는 평년의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경북 산지에서는 "농약값도 안 나온다"는 말까지 나왔다. 두 밭이 그 파고 위에 서 있는 이유는 샤인머스캣을 심어서가 아니라, 센서와 자동화로 수출 규격의 샤인머스캣을 만들어서다. 영천농협에 따르면 수출 포도는 내수보다 두 배 이상 값을 받는다.

아치형 지붕으로 넓게 구성된 포도 농장의 모습. 노컷TV 허태환 PD아치형 지붕으로 넓게 구성된 포도 농장의 모습. 노컷TV 허태환 PD
박 씨의 습도계와 이 씨의 자동 밸브는 농부의 감을 지운 것이 아니다. 수십 년 감으로 어림짐작하던 값에 숫자를 붙였고, 사람의 실수가 끼어들 틈을 줄였다. 감이 데이터가 되자 포도는 태평양을 건널 만큼 고르게 여물었다.

개방 첫 세대의 포도밭은 무너졌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데이터를 딛고 다시 섰다. 20년 전 관세와 함께 들어온 경쟁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영천의 두 농부는 그 경쟁의 무대를 수입산과 겨루는 국내 매대에서 국산 포도가 제값을 받는 해외 매대로 옮기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 본 기사는 2026년 FTA교육홍보지원사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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