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본부 내 총회장 전경오는 22일부터 미국 뉴욕에서 제81차 유엔총회가 시작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후 두 번째로 이 자리에 선다. 올해 총회 주제는 '신뢰 회복과 변화 관리: 모두를 위한 성과를 내는 유엔'이다. '신뢰 회복'과 '변화 관리', 이 여덟 글자 속에 지금 유엔이 마주한 이중의 도전과제가 응축돼 있다.
초강대국이 자국우선주의의 기치를 내걸면서 국제기구로부터 발을 빼려 하고 주요국 간 비협조가 안보리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가운데,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임기 마지막 해를 '유엔80 이니셔티브' 개혁에 쏟고 있다.
개혁의 필요성 자체에는 회원국 대다수가 공감한다. 그러나 예산·조직 효율화가 공여국의 비용 절감 요구에서 출발한 탓에 개발협력 재원 축소와 지속가능발전 목표 이행 저해를 우려하는 개도국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자칫 개혁 논의 과정 자체가 결속이 아닌 새로운 균열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진영 간 입장이 팽팽할수록, 제3의 목소리를 내는 중견국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커질 공간도 넓어진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초강대국이 힘으로 세계를 좌우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다극화된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교롭게도 이 개혁을 이끌어야 할 리더십 자체가 교체기를 맞고 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10년 임기가 연말로 끝나는 가운데, 후임 사무총장직 출마를 선언한 후보만 여덟 명이다. 다극화된 세계를 이끌 새 사무총장에게는 강대국 간 신뢰를 지키는 중재력, 개혁을 완결할 결단과 관리 역량, 다양한 회원국을 아우르는 포용력이 요구된다.
사무총장 선출에 실질적 권한이 있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간 뚜렷한 선호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험난한 시대에 유엔의 과제를 이끌어 갈 리더십의 승계는 임기 개시를 몇 달 남겨놓지 않고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이런 시기에 대한민국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은 각별한 무게를 지닌다. 유엔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맡았고, 유엔군의 이름으로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냈다. 전쟁 폐허에서 다시 일어선 한국은 원조받던 나라에서 반세기 만에 원조를 주는 나라로, 그리고 다시 한 세대 만에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개도국의 절박함과 공여국의 책임감을 모두 겪어본 드문 이력은 '유엔80 이니셔티브'를 둘러싼 공여국·개도국 간극에 다리를 놓을 자산이다. 한국이 자처할 수 있는 것은 진영 간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가교(架橋)다.
작년 유엔총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민주적인 대한민국의 복귀와 글로벌 책임강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국가 간 격차를 좁히고 국제사회 현안에 대한 공동 해법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올해는 가교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역할을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유엔 개혁 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함께, 새 리더십이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평화·개발·인권이라는 유엔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는 정상 차원의 의지를 밝히기를 기대한다.
이는 '유엔80 이니셔티브'와 사무총장 선출 과정에 실질적 목소리를 내는 구체적 행보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은 한 세대 만에 선진국 문턱을 넘은 나라가 국제사회에 갖는 최소한의 책무이며 다극화 시대가 요구하는 '중견국의 확대된 역할'에 대한 대한민국의 응답이기도 하다. 신뢰가 흔들리는 지금이야말로,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의 다리를 놓아야 할 때다.
이태호 전 외교부 제2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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