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 내리는 이사나예 라미레스 감독. 연합뉴스국가대표팀 임기 종료와 동시에 짜놓은 각본처럼 이뤄진 남자 프로배구 KB손해보험의 이사나예 라미레스(42) 감독 선임 발표는 배구계에 적잖은 씁쓸함을 남겼다.
KB손해보험은 지난 5일 평택 남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2026~2027시즌 출정식 직전 보도자료를 통해 "팀의 도약과 쇄신을 이끌 차기 사령탑으로 이사나예 라미레스 감독을 선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난 시즌 도중 레오나르도 카르발류 감독의 사퇴 이후 하현용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완주했던 KB손해보험은 6개월 만에 사령탑 공석을 채웠다.
구단은 지난 시즌 종료 직후 10여 명이 넘는 외국인 지도자 후보군을 폭넓게 물색했다. 이 중에는 라미레스 감독보다 국제무대 명성과 커리어가 훨씬 화려한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KB손해보험의 최종 선택은 라미레스였다. 대표팀을 지휘하며 쌓은 높은 V리그 이해도와 한국 배구 환경 적응력, 장기적인 관점에서 2~3년 이상 팀을 안정적으로 리빌딩할 적임자라는 내부 평가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단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임은 겉으로는 대표팀 계약이 만료된 지난 4일 이후에 맞춘 정상적 절차로 포장됐을 뿐, 실질적으로는 해묵은 '겸직 논란'의 연장선이자 사실상의 '원격 겸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세사르 곤살레스 전 감독은 프랑스 넵튠스 드 낭트 사령탑을 겸임하며 대표팀에 온전히 전념하지 못해 성적 부진과 함께 큰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대한배구협회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겸직 없는 전임 사령탑' 원칙을 세웠고, 라미레스 감독 역시 2024년 4월 취임 당시 "한국 배구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배구계 안팎에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던 소문대로, KB손해보험과의 차기 사령탑 내정 및 영입 합의는 이미 지난 4월에 마무리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정식 사령탑을 발표하지 않은 채 KB손해보험은 지난 5월 라미레스 감독의 오랜 조력자인 카카로토 코치를 영입해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부터 비시즌 훈련 전반을 맡겼다.
사령탑의 최측근이 구단 훈련과 선수 구성을 총괄하는 동안 라미레스 감독이 구단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챙기며 교감을 나누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배구협회와의 전임 계약 신분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두 집 살림을 진두지휘한 셈이다.
작전 지시하는 라미레스 감독. 연합뉴스설령 비시즌 동안 라미레스 감독의 개입이 일절 없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남는다.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야 비로소 정식 지휘봉을 잡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V리그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한들, 사령탑이 직접 훈련을 이끌며 자신의 배구 철학과 전술 색깔을 팀에 입히기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비시즌 동안 구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면 '원격 겸직'이라는 윤리적 비판을 피할 수 없고,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면 개막 직전 '졸속 부임'에 따른 조직력 불안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더 큰 의문은 국가대표팀 차출을 둘러싼 유불리 구도다. 사령탑의 입김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이번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에서 KB손해보험 소속 선수는 미들블로커 차영석 단 1명에 불과했다. 대표팀 주포로 뛴 임성진은 국군체육부대(상무) 소속이어서 구단의 당장 시즌 전력 공백과는 무관했다.
배구계 안팎에서는 KB손해보험에도 공수 양면에서 대표팀 즉시전력감으로 꼽힐 만한 자원들이 충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거 배제된 것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반면 V리그 경쟁 구단들은 극심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대한항공은 임동혁, 임재영, 정한용, 최준혁 등 무려 4명이 차출됐고, 현대캐피탈 역시 허수봉, 신호진, 박경민 등 공수의 핵심 3명이 묶였다. 6월 AVC 챌린지컵부터 9월 아시아선수권, 10월 아시안게임까지 이어진 강행군 탓에 경쟁 구단들은 주전들이 극심한 피로를 안은 채 제대로 손발조차 맞추지 못하고 개막을 맞이하게 됐다.
이와 달리 KB손해보험은 대표팀 사령탑을 데려오면서도 정작 대표팀 차출에 따른 체력 고갈과 전력 누수는 완벽하게 비껴갔다. 아시안게임 8강 탈락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남긴 라미레스 감독이지만, 리그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자신이 이끌게 된 프로팀은 비시즌 완벽한 담금질을 마쳤다는 '기묘한 특혜'를 쥐고 출발선에 서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미레스 감독은 "KB손해보험의 감독을 맡게 돼 영광"이라며, "비시즌 동안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준비를 잘 해준 만큼 경기 집중력과 승리를 향한 위닝 멘탈리티를 바탕으로 이번 시즌 팬들에게 좋은 경기를 선보이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비시즌 동안 원격으로 팀을 다져온 사령탑의 뒤늦은 취임 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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